■ 퇴계退溪 이황 1편
■ 퇴계(退溪) 이황 1편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은 한·중·일 동양 3국에서 공자(孔子)·맹자(孟子)와 같은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아 이자(李子)로 받들어지고 있다. 특히 일본은 임진왜란 때 퇴계전서(退溪全書)를 몰래 가져가 복간(復刊)한 뒤에 추종학자들이 이자전서(李子全書)라는 이름으로 다시 간행했다. 일본에서 이 학맥은 계속 이어져 내려와 일본의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근본사상으로 자리 잡을 만큼 유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이황은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禮安縣 溫溪里: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薰陶) 아래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 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후로 늘 병에 시달렸다.
이황은 1527년(중종 22년)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의 초시(初試)에 합격 한 뒤,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 응시를 위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다음해 진사 회시(會試:복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聖人君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고향에 돌아가 3년간 복상(服喪)했고,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유능한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공부하게 함)의 은택을 받았다.
조선 초기 관학파 유학자들은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15~16세기 시간이 흘러가면서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제 9대 성종 시대에 이르게 되면 중앙에 있던 유학자 중에서 대지주(대토지소유자)는 왕과 권력을 다툴 만큼 권력이 비대해 졌다. 그리하여 성종은 지방 출신의 신진유학자들을 대거 등용하는데, 이런 인물들을 등용하면서 왕권을 안정시키고 기존 관료들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그로 인해 유학자들은 두 세력으로 나누어졌는데, 기존 관료 세력을 ‘훈구파’라 하고 신진 세력을 ‘사람파’라 한다. 사림세력은 지방에 있는 중소지주들로서 훈구대신들과 경쟁에서 번번히 화(禍)를 입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50년에 걸쳐 4번의 사화(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가 일어난다. 사림세력들은 사화가 일어날 때마다 큰 화를 입고 향촌으로 물러나서 수양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퇴계 역시 중종 말년에 사화(士禍)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관계(官界)를 떠나 산림에 은거(隱居)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