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계退溪 이황 2편
■ 퇴계(退溪) 이황 2편
1543년 10월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賜暇)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유학자의 삶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출사(出仕)를 해서 관리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수기(修己)로서 나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것이다. 수기라는 것은 원래 ‘거울을 닦는다’는 뜻으로 마음의 거울을 닦는 것이다.
마음의 거울에 때가 끼어 있는 게 바로 욕망이다. 당시 유학자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 하여, ‘수양을 통해 자기의 인격을 완성하고 나아가 세상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 ‘수기(修己)’를 바탕으로 ‘치인(治人)’ 하는 것은 출사(出仕)를 해서 관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를 다스리는 임금과 일치하지 않으면 뜻을 펼칠 수가 없다. \\
그래서 출사(出仕)와 은(隱)의 중간에 사림(士林)이 위치했다. 지금 당장 나가서 관리가 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다음을 기약한다는 것이다. 이 당시는 퇴계 이황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명 조식(1501~1572)과 화담 서경덕(1489~1546) 선생들도 은거(隱居) 하면서 유학자의 도를 따랐다.
이황이 45세로 관직에서 한창 뻗어 나갈 무렵인 1545년, 문정왕후와 외척인 윤원형 일파의 소윤 세력이 득세하고 윤임 일파인 대윤을 숙청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죽고 유배되었다. 이황의 넷째 형 이해(1496~1550)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고, 이황 자신도 삭탈관직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년)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서 자연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求道)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雅號)로 삼았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임관(任官)의 명을 받게 되자 매번 거절하기 어려움에,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가 아닌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오는 것을 피해 봉임(奉任) 전에 자청(自請)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임지를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朱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세운 것처럼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풍기군수가 된 지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1552년 또 다시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固辭)하였다. 1543년 이래로 관직을 사퇴(仕退)하였거나 임관(任官)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나 되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