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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파란만장 단종의 짧은 생生 5편

■ 파란만장 단종의 짧은 생生 5편

■ 파란만장 단종의 짧은 생(生) 5편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장인 송현수와 숙부 금성대군의 죽음을 듣자 슬픔을 못 이겨 목을 매고 자살하였고, 후에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무덤을 방치해 둔 점, 죽은 후 금성대군과 같이 왕실 족보에서도 삭제당한 것으로 보아 타살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중종 때 이르러서야 단종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무덤을 찾을 수 있었고, 단종이란 묘호를 받고 능으로 단장된 것도 숙종 때의 일이다.

숙종실록과 야사 등에는 사약을 가져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엎드려 울기만 하자 옆에 있던 하인이 대신 목을 졸라 죽였다고 나온다. 이 설(說)은 2가지 버전이 있는데, 하나는 정당한 왕인 자신이 사약을 마실 수는 없어서 자신은 방에 들어가고 활줄을 자신의 목에 감고 밖으로 내어 하인에게 당기라고 했는데 그 뜻을 몰랐던 하인이 당기자 사망했다는 것 한 가지. 다른 하나는 단종이 사약을 마시지 않고 버티자 단종을 살해하면 상을 받으리라 생각한 한 하인이 단종의 목을 졸라버렸다는 것이다.

시신 수습을 두고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중앙관리가 아닌 지방 아전인 호방(戶房) 엄흥도가 강물에 떠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몰래 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나이가 많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모를 위해 준비해둔 관과 수의를 썼다고 한다. 생육신 중 하나였던 조려가 단종의 죽음을 전해 듣고 영월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했다는 말도 있다. 이 때 강물이 불어서 영월로 건너가지 못한 조려가 통곡을 하자 호랑이가 나타나서 등에 태워 강을 건넜다는 설화도 존재한다.

당시에는 당연히 단종의 추모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던지라 후환이 두려웠던 엄흥도는 매장을 마친 뒤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그 길로 영월을 떠나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실제로는 인근 주민들이 엄흥도 일가족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관에 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단종 복위 다음 해에 공조좌랑, 영조 때는 참의와 참판을 거쳐 순조 33년(1833년)에는 공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육부 중에서도 공조(工曹)판서로 추증되었던 것은 왕릉의 조영을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이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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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고종14년(1877년)에는 충의공이란 시호와 함께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란 정승급 벼슬에 추증된다. 엄흥도가 원래 지방의 미관말직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단종의 최후에 그 시신을 수습한 충의를 후세에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만하다. 세조가 살기등등하던 시절이었으니 목숨을 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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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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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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