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1편
■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1편
임진왜란 발발(勃發) 직후, 선조나 한양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명장으로 소문난 신립장군과 이일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상황이 급변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21일 선조는 “오늘날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서 감당해낼 자가 없으니 신은 오직 죽을 따름입니다.”라는 이일장군의 보고서를 받았다.
선조는 만약의 경우 파천(播遷:임금이 다른 곳으로 피난)하기 위해 은밀히 미투리 등 피난 물품을 준비하고, 언제라도 쓸 수 있게 말을 대령하게 했다. 그리고 궁궐 밖에 살던 자녀와 사위, 며느리들을 불러들였다. 선조의 자녀들이 입궁하자 파천 소문이 퍼져나갔고,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4월 27일 상주 전투에서 이일장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한양에 알려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도성(都城) 밖으로 나가는 피난 행렬이 줄을 이었다. 조정 신료와 종친들은 파천 소문에 분개하며 결사 항전을 부르짖었다. 결국 선조는 “종묘와 사직이 이곳에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며 파천하지 않겠다고 공언(公言)했다.
그러나 파천 소문 자체가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고, 대신들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자를 세울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4월 28일 급하게 장남인 임해군을 제치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됐다. 4월 29일 저녁, 방어선으로 구축되었던 충주에서 신립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양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날, 한밤중에 파천이 결정되면서 선조는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째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모셔와 파천 행렬에 동참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왕자들을 파견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는 것이었는데, 둘 다 파천반대론을 누르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선조의 아들 7명 중 2명은 미성년이었으므로 세자 광해군을 제외하면 4명의 왕자들을 모두 파견해 근왕병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그 중 임해군과 순화군 두 명만 각각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게 했다.
선조와 떨어져 근왕병을 모집하게 된 임해군은 21세로 이미 성년인데 비해 순화군은 13세에 불과했다. 반면 선조를 수행하게 된 신성군과 정원군은 각각 15세, 13세였다. 세자 광해군은 18세였다. 13세의 순화군이 15세의 신성군을 제치고 근왕병 모집에 나서게 된 이유는 선조의 편애 때문이었다.
선조는 후궁 중에서 숙의 김씨를 가장 총애했다. 당연히 아들들 중에서 숙의 김씨 소생인 신성군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실 선조가 임진왜란 때까지 세자 책봉을 미룬 가장 큰 이유는 신성군 때문이었다. 선조는 신성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 했지만, 왕비의 아들도 아니고 후궁 소생 중 첫째도 아니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선조는 조금 더 때를 기다렸다가 신성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뜻밖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부득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던 것이다. 선조는 신성군으로 하여금 자신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만약의 경우 세자 광해군을 대신하게 할 생각이었다. 신성군의 친동생인 정원군 역시 숙의 김씨 소생이었기에 선조를 수행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근왕병을 모집하게 된 임해군이나 순화군은 상대적으로 선조의 관심 밖에 있던 왕자였다고 할 수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