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3편
■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3편
가토가 회령에 들어왔을 때 왕자를 비롯한 대신들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가토는 “이 사람들은 너희 국왕의 친아들과 조정 대신들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곤욕을 주는가?”라며 결박을 풀게 했다. 이후 가토는 6진 지역을 모두 접수하고 9월 초에 안변으로 철군했다.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역시 안변으로 끌려갔다. 그때 가토는 돗자리로 싼 가마를 만들어 왕자들을 옮겼다. 밤이 되면 방문을 새끼로 얽어 묶고, 수많은 보초병을 세우고 밤새 불을 밝혔다.
7월이 되어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7월 8일 한산도대첩에 이어 7월 17일에는 명나라 장수 조승훈이 이끄는 3500명의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공격했다. 비록 이 공격은 실패했지만 조만간 명나라 군대 10만명이 출병(出兵)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조선군의 사기는 높아진 반면 왜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가토를 비롯한 대부분의 왜장은 명나라와의 장기전에 대비해 대책을 세우고자 했다. 가토는 조선 땅을 분할함으로써 일단 조선과 화친했다가 장기적으로 명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가토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이용하려고 했다. 즉 두 왕자를 돌려보내는 대신 대동강 이남지역 또는 한강 이남지역을 받아내려는 계산이었다.
대동강과 한강 사이를 절충지대로 하고, 대동강 이북은 조선이 한강 이남은 일본이 점유한다면 명나라가 합의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명은 요청에 의해 참전하기는 했지만 확전을 원하지는 않았고, 다만 일본군이 명나라로 침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군이 한강 이남에 머물겠다고 하면 명나라는 굳이 반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설령 조선이 반대한다 해도 명나라가 밀어붙이면 협상은 관철될 수 있었고, 게다가 왕자들까지 풀어주겠다고 하면 협상 타결의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가토는 포로로 잡은 이홍업에게 자신의 협상안을 주어 선조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여기에 더해 왕자들의 편지는 물론 수행 대신들의 편지도 함께 보냈다. 가토의 협상안과 왕자들의 편지가 선조에게 전해진 때는 10월 19일이었다. 당연히 조정 중신들은 가토의 협상안을 결사반대했다. 선조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조는 협상안을 가져온 이홍업을 사형시킴으로써 거부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는 한편, 명나라에도 강력한 반대 의지를 알렸다.
조선군과 왜군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1592년 12월 26일에 4만3000여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전세(戰勢)가 바뀌었다. 1593년 1월 8일 조명연합군은 평양을 탈환했다. 이여송은 그 여세를 몰아 개성까지 탈환했고, 1월 24일에는 서울 근교의 벽제역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왜적을 얕보던 이여송은 벽제역에서 유인술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놀란 이여송은 평양까지 후퇴하고 더 이상 진격하려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일본과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명나라는 임해군과 순화군 석방에 총력을 기울였다. 두 왕자를 송환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왜군과 협상하자고 하면 선조가 결사반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