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군暴君이라 불리는 남자 2편
■ 폭군(暴君)이라 불리는 남자 2편
연산군(燕山君)이 기예에 뛰어난 여자들을 뽑은 것은 자기 자신이 시를 좋아하는데다가, 거문고 등 배우기 어려운 악기들도 다룰 줄 알고 작곡, 작사를 할 만큼 음악적인 재능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원래 흥청(興淸)이란 고려 때부터 궁중 음악을 연주하는 관기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연산군(燕山君)이 음락을 즐기기 위해 만든 기구가 아니었다. 여악(女樂)이 되려면 장악원(掌樂院)에 들어가서 가무와 예절을 익히고 글을 배워야 했고, 이들은 팔관회 등 각종 행사에 동원되어 음악을 연주했다.
연산군(燕山君)을 폭군로 규정짓는 가장 대표적 사건이 백모(伯母)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는 것이다. 실록에는 연산군(燕山君)의 간통설과 관련해 사관(史官)이 이를 확인하거나 믿을 만한 자료를 인용해 기록한 것은 없고, 모두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추측을 사실인 것처럼 기록한 것뿐이다. 더구나 박씨는 당시 50살이 넘은 나이였고, 연산군(燕山君)은 서른 살도 안 되었을 때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이를 증명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 이야기는 아마도 연산군을 더욱 폭군 망나니 이미지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요즘으로 치면 ‘가짜뉴스’였던 것 같다.
월산대군은 첩에게서 두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20년을 같이 산 박씨와의 사이에서는 소생이 없었다. 이는 박씨에게 불임의 원인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러므로, 박씨 부인이 연산군(燕山君)의 아이를 잉태하여 자살하였다는 염문설은 ‘유언비어’ 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에 대해 긍정적이고 좋은 기록이 남겨질 리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역사는 승자(勝者)의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인가 보다.
《연산군일기》에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쫓겨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를 때려죽인 다음 살을 찢어 젓을 담아 산천에 뿌렸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연산군(燕山君)이 대신들과 함께 엄씨와 장씨의 장례문제를 대신들과 의논했다는 기록도 있다. 자기가 찢어 죽인 사람에 대해 장례문제를 의논할 리가 있겠는가.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자면 연산군(燕山君)이 황음(荒淫) 무도(無道)한 폭군이라는 것은 조금은 침소봉대(針小捧大)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또 성장과정에서 겪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 성종에 대한 원망이 ‘영명한 군주’라 불리우던 그를 그토록 망가지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