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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일 월요일

풍류가 월산대군

■ 풍류가 월산대군

■ 풍류가 월산대군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은 별 다른 치적을 남길 새도 없이 즉위 1년 3개월 만에 죽었다. 왕세자 제안대군(이현)은 아직 4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그렇다 치고 세조의 큰아들(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의 장남(長男)인 월산대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아들인 성종(잘산군)이 왕위를 이어받은 것은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다. 성종의 즉위는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궁중의 어른으로서 세조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시행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최고의 권신이자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韓明澮)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뒤이어 비정상적인 성종의 즉위에 대한 종친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종실의 대표자격이며 당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구성군(龜城君) 이준을 제거하였다. 당시 왕위 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왕위를 빼앗기다시피한 월산대군은 무마책으로 좌리공신(성종즉위 공신)에 책봉되었다. 월산대군은 세조가 매우 아끼고 사랑하여 궁중에서 자랐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비롯하여 여러 학문까지 친히 세조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천성이 원만하고 총명하기가 여느 사람과 달랐다. 하지만, 종친으로서 평온한 삶을 택한 월산대군은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해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성품은 침착하였다.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고 풍류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고양(高陽)의 북촌에 있는 별장에서 자연에 묻혀 여생을 지냈다.

그는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兩亭)을 개축하여 망원정(望遠亭)이라 이름 짓고,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생활을 즐겼다. 성종이 자주 그 집에 행차하기도 하였고, 그의 정자에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월산대군은 어머니인 덕종 비(妃) 인수왕후(仁粹王后)가 병환이 깊어지자, 극진히 간호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병이 들어 35세로 죽었다. 적자는 없고, 측실에서 난 아들이 둘 있었다.

부드럽고 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문 여러 편이 《속동문선》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문집《풍월정집》이 남아있는데, 그 중 잘 알려진 그의 시 한 수이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돌아오노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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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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