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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8일 목요일

한글창제를 도운 정의공주 2편

■ 한글창제를 도운 정의공주 2편

■ 한글창제를 도운 정의공주 2편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는 아들 8명과 딸 2명이 있었다. 정의공주는 그 중 둘째 딸이었다. 세자 향(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수양대군(세조)의 누나였다. 맏딸 정소공주가 13세의 나이로 일찍 죽어서 둘째 딸인 정의공주가 세종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세종이 중국에서 사온 안장을 손수 고치려고 칼로 깎다가 칼끝이 다리에 박히자 공주는 술을 만들고 난 지게미醋粕를 데워 상처에 붙여 부기가 빠져나가게 한 후 자석(指南鐵)을 가지고 부러진 칼끝을 빼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428년(세종10년) 정의공주(貞懿公主)에 봉해지고, 고려 말 조선 초 명문 출신으로 함흥 부윤을 역임한 안망지(安望之)의 아들 안맹담(安孟聃)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세종은 정의 공주와 안맹담의 집에 수차례 이어(移御:친히 방문)하였을 정도로 이들 부부를 아꼈는데, 여기에는 정의공주의 뛰어난 재주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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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는 정의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역산(曆算)에 밝아 세종이 사랑하였다는 정도로만 기록돼 있다. 지금으로 치면 천문학과 수학을 아주 잘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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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공주와 남편 안맹담은 불교에 조예가 있었다. 남편 안맹담과 함께 세종 승하 후 소헌왕후와 세종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문수사(文殊寺)를 중창(重創)하였다. 안맹담도 평소 불경을 읽고, 살생을 싫어하여 양잠(養蠶)도 하지 않는 등 공주 부부는 불교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의공주는 1469년(예종1년)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죽은 연창위 안맹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지장보살본원경』은 보물 제966호로 지정되었다.

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계유정난으로 죽음을 당한 것에 반해 정의공주의 남편 안맹담은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봉해진 바 있다. 1477년 사망하여 남편 안맹담을 장사지낸 양주 도봉산 해촌동(海村洞) 묘원에 묻혔다. 1982년 11월 13일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이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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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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