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왜降倭:투항왜병 1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1편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2~3만 명(일본측 자료)에서 10만~40만 명(조선측 자료)에 달한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어떨까. 조선에 귀화했거나, 혹은 항복한 일본인은 사야가(김충선) 말고는 없었을까? 아니다. 있다. 1597년(선조 30년) 5월18일 도원수 권율이 죽도와 부산의 적진에 밀파한 간첩들의 보고를 정리하여 조정에 알린 내용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왜인들의 시름이 큽니다. 항왜(降倭:항복한 일본인)의 수가 이미 1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일본의 용병술을 다 털어 놓았을 테니 심히 걱정된다고 수근거립니다. 지금 경상우병사가 거느린 항왜만 해도 1000명에 달합니다.』고 했다. 또 1595년(선조 28년)의 보고서를 보면 『북쪽 변방에 이주시킨 항왜의 숫자가 5000~6000명에 이른다.』고 했다.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항왜(귀화 혹은 항복한 일본인)의 수는 42건에 600명에 달한다. 기록된 숫자가 이 정도니 실제로 엄청난 수의 왜인이 갖가지 이유로 항복하거나 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선조실록》 등을 살펴보면, 심상치 않은 이름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즉 사고소우, 연노고, 산여문, 요질기, 훤도목병위, 평구로, 요시지로, 조사랑, 노고여문, 사백구, 세이소…. 일본임임을 알 수 있는 이름들이다. 또 김귀순(金歸順), 김향의(金向義), 이귀명(李歸命) 등은 귀순하고(귀순), 의를 좇았으며(향의), 천명에 귀의했다(귀명)는 뜻에서 조선 조정이 하사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인들은 왜 투항했을까. 전쟁이 나자마자 귀화의 길을 택한 김충선 같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초기에는 항왜(降倭)가 없었다. 왜군이 전쟁 발발(4월13일) 20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으로 질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명나라가 참전함에 따라 전쟁이 장기전 양상을 띠게 된다. 항왜의 기록은 1593년(선조 26년) 5월22일 처음으로 등장한다. 왜적 중에 100여명이 명나라 군에게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나라군은 항복하는 왜병들을 다 받아주고 심지어 상급(賞給)까지 내렸다. 선조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왜적에게 명나라 군이 상까지 내린다니 있을 수 없다”고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엇보다 항복한 왜병들이 조선 땅을 가로질러 명나라로 압송될 경우 평양 서쪽의 지리를 꿰뚫어보게 될 것이고, 이 포로들 가운데 다시 일본으로 도망가는 자가 있다면 조선 지리의 허실(虛實)이 다 드러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선조의 걱정이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