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왜降倭:투항왜병 2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2편
선조는 비변사에 “항복한 왜군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명나라 파병군에게 전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비변사는 이를 제지했다.
『전하의 말씀은 맞습니다. 저 왜적들은 만세의 후라도 반드시 복수해야 할 원수이고, 저들의 살점을 베어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 장수들은 ‘조선은 어찌 그리 속이 좁으냐’고 힐난하고 있습니다.』《선조실록》
당시 중국군은 ‘오랑캐가 아침에 쳐들어와서 저녁에 항복하기만 하면 다 받아준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군에게 아무리 말을 해봐야 속 좁다는 소리만 들을 것이 뻔하니 전하께서는 참으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쟁을 일으킨 왜적에게 품은 적개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가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상황이 달라졌다. 전쟁 발발 2년 4개월이 지난 1594년 8월 선조가 내린 명령을 보면 생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선이 전투에서 이기지도, 용기백배하여 방어하지도 못하면서 항복·귀순하는 왜인들을 거절하고 있다. 이는 옳지 않은 처사다. 항복한 왜인이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한다. 왜군의 군졸을 이렇게 앉아서 얻었는데, 지나치게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처음에 항복한 왜병을 요동으로 보냈던 조선 조정은 차츰 경상·함경·강원·충청·황해의 바닷가와 외딴 섬으로 보냈다. 또 시간이 흐르자 제주나 진도 등지의 수군 및 각 진에 나눠 이주시켰다. 점점 ‘항왜’의 관리가 골치 아파지기 시작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1594년(선조 27년) 6월 비변사가 아뢰었다. 『투항한 왜적을 경상도 내륙지방 한 고을 당 7~8인 혹은 15~16인씩 두었는데 골치 아파합니다. 매우 후하게 대접해서 하루 세 끼를 먹여주는데도 왜노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뜻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칼을 들이대고, 저들끼리 싸워 서로 죽인답니다. 이들이 진심으로 투항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선조실록》
그렇다면 왜인들은 왜 조선조정에 투항했을까.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장기주둔이 계속되자, 왜군은 보급로 차단으로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다. 1595년(선조 28년) 4월19일 비변사가 항복한 왜인인 조사랑(助四郞)과 노고여문(老古汝文) 등 11명에게 술과 안주를 먹이자 ‘항복한 이유’를 술술 털어놓았다.
『우리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의 휘하에서 예속된 장졸들입니다. 여러 장수들의 진영을 오가며 감당해야 하는 수자리(전방수비)를 괴로워하던 차에 조선이 후히 대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후략).』《선조실록》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