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왜降倭:투항왜병 3편
■항왜(降倭:투항왜병) 3편
포악한 왜장의 휘하 장졸들일수록 귀순·투항자가 많았다. 즉 1597년(선조 30년) 조선은 항복한 왜인 세이소(世伊所)와 마다사지(馬多時之)를 다시 적진에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휘하 군관을 5명이나 귀순시켰다. 왜장 가운데는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포악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선조실록》을 보면 그 평가가 맞는 듯하다.
『사역이 너무 과중하고 장수의 명령이 너무도 혹독하여 그 노고를 견디지 못하고 몸을 빼어 도망쳐 왔습니다. 우리(5명) 외에도 귀순하려는 자가 많습니다. 계속 유인하면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형세는 자연히 고단해질 것입니다. 요즘 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사졸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군졸이 하루에 100명에 이릅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1596년 7월 이순신 진영에 왜인이 5명 항복했는데, 투항이유가 ‘장수가 너무 포악했고, 그 역도 과중했기 때문(將倭性惡 役且煩重)”이라 했다.』
항복한 왜인들을 후대한 조선 조정의 ‘항왜 정책’도 왜인들의 항복을 가속화시켰다. 조선 조정은 투항하는 왜적에게 첨지(정3품 무관), 동지(삼군부의 종2품) 등의 고위관직을 내렸다. 처음엔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왜병들이란 교활하여 믿을 수 없는 자들이며, 그들을 먹일 식량 또한 여의치 않다”는 의견들도 많았다. 그러나 경상우병사 김응서 등은 매우 긍정적으로 항왜를 바라보았고, 무엇보다 선조 임금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선조는 1595년(선조 28년) 승정원에 “왜병의 항복을 적극 유치하라”면서 “그들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줘라”는 명을 내린다.
『항왜를 유인하는 일은 손해될 게 없다. 다방면으로 환대하고 상을 주어 투항을 유도하라. 그 중에 검술을 할 줄 알거나 병기를 잘 만들거나 하는 자를 꾀어내면 파격적인 상을 내려야 한다고 비변사에 일러라.』
심지어 선조는 항왜 유치를 반대한 신료들에게 『자네들은 투항한 왜병들을 의심하고 그들을 대접해준다고 불평해왔다. 원래 과인이 항왜들을 많이 유치하려 했지만 자네들 때문에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가. 지금 항왜들 만이 충성을 제대로 바치고 있다. 먼저 성 위로 올라가 죽을힘을 다해 적병을 죽이고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운다. 이들에게는 모두 당상관(정3품 이상)의 직책을 내리고, 은(銀)을 상급으로 하사하라.』《선조실록》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