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왜降倭:투항왜병 5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5편
여여문의 말대로 『쳐들어올 때는 반드시 소수의 군사로 유인하여 적이 매복한 곳에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잇따라 일어나 공격한다.』는 왜군의 전법은 칠천량 해전에서 입증되었다. 이때 조선군은 일본군의 전법에 말려 단 12척의 전선만 남긴 채 사실상 전멸했던 것이다.
여여문은 전쟁터로 달려가 한목숨 바칠 각오가 있음을 피력하기도 했다.
『제가 현장으로 내려가서 산성을 다시 쌓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아니면 저를 요해처로 보내 주십시요.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선조실록》1597년 1월4일
여여문은 “후한 이익을 좋아하는 일본인을 유인하기는 쉽다”면서 “일본군을 꾀어 적장을 모살하도록 계획을 세우면 아마도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책을 올렸다. 과감하게도 ‘적을 이용한 적장 모살 작전’을 아뢴 것이다. 여여문은 이때 조선을 ‘우리(我) 조선’이라고 표현했다. 여여문은 뼛속까지 조선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항왜’ 여여문이 ‘우리 조선’ 운운하면서 계책을 논하고, 조선군의 약점을 설파했을 때, 선조 임금의 반응은 어땠을까. “부끄럽다”는 반성이었다. 선조는 “그가 말한 대로 시행하라. 여여문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 일이 부끄럽기도 하다.”라고 했다.
이 뿐이 아니었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년) 5월17일 여여문은 적진에 정탐꾼으로 밀파되어 왜군의 정세를 상세히 보고하는 임무를 맡는다. 여여문은 머리를 깎고 왜인의 옷을 갈아입고 적진에 잠입했다. 여여문은 울산, 즉 성황당·도산·태화강 등 3곳의 적병숫자를 파악해서 손수 형세도를 그린 뒤 빠져나왔다. 여여문의 형세도를 본 명나라군 양호 총사령관은 크게 기뻐하면서 은 10냥을 내려주었다. 물론 여여문의 형세도대로 작전을 짰다. 명나라군의 마귀 제독이 군사를 일으키자 여여문을 다시 적진에 침투시켰다. 여여문은 전투가 벌어지자 왜군 4명의 수급을 베어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명나라 마귀 제독은 여여문을 죽이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왜적의 수급마저 다 빼앗아 그의 공을 가로채 버렸다.
《선조실록》에는 1598년(선조 31년) 3월 27일 여여문의 죽음을 알리면서 『여여문이 베어낸 왜적의 4수급을 마귀가 빼앗는 것을 똑똑히 본 사람들이 많다. 여여문 말고도 소운대(小云大)라는 항왜 역시 아군을 위해 공을 세웠고, 왜적을 여러 명 유인했다.』고 기록했다. 여여문이 죽은 지 두 달이 지난 1598년(선조 31년) 5월 17일 우의정 이덕형은 항왜 여여문의 공적을 일거한 뒤 반드시 상급을 내려야 한다고는 주청을 올린다. “여여문은 임진란 이후로 종군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처자식도 모두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가상한 일입니다. 여여문을 논상함으로써 격려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 6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