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주대첩 2편
■ 행주대첩 2편
권율은 이처럼 가문도 좋고 영특한 인물이었지만, 40세가 되도록 관직에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본부인인 조광원의 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딸 1명을 낳고 일찍 사망하였는데, 그 딸이 후일 이항복과 결혼하여 그는 이항복의 장인이기도 하다.
친구들이 권율에게 왜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가를 묻자, 권율은 "옛날 태공망은 나이 80에 현달(顯達:인품과 덕망으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하여 천하를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했는데 아직 내 나이가 태공망의 반밖에 안 되는데다 능력까지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출세가 늦을 걸 걱정하겠는가?" 며 반박했다고 한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풍모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다른 선비들처럼 방에 틀어박혀 글공부만 하지 않고, 지인들과 어울려 전국을 여행하거나 지리를 연구하는 등 한량(閑良)처럼 지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지자 깨달은 바가 있어서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들어가 과거 공부를 시작했다. 뒤늦게 46살이 되던 1582년(선조 15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를 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여기에는 사위인 이항복이 1580년(선조 13년)에 과거에 급제한 영향이 컸다.
이항복은 가족관계에서는 사위이지만 과거 시험으로 따지면 권율보다 2년 선배가 된다. 가족들이 이항복과 비교하며 사위는 벌써 관직에 나가서 활약하고 있는데, 장인어른이라는 사람이 집에서 놀고먹고 있는 게 말이 되냐는 타박으로 인해 권율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것을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호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87년(선조 20년) 전라도 도사로 나갔다. 1588년(선조 21년)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고, 그해 9월 호조정랑을 역임한 뒤 함경도 경성부판관(鏡城府判官)으로 부임하였다. 1590년(선조 23년) 8월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1591년 초 다시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가, 류성룡과 윤두수의 추천을 받아 의주 목사로 전격 발탁되었다.
의주목사 재직 중 당상관으로 승진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해직되었다. 늦게 관직에 나온데다가 문관 출신이다 보니 부하들 중에는 권율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1592년 봄 북경에 간 역관(譯官)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요동 지역을 어수선하게 했다는 말이 나와서 국문(鞫問)하는 일이 있었는데, 권율도 이 사건의 불똥을 맞아 파직된 것이다.
그의 나이 56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한양이 함락되고, 4월 30일 선조를 비롯한 왕실이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고니시 유키나카의 군대가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자 상소를 올려 경상도와 전라도 양쪽에 큰 진지를 구성해둘 것을 왕에게 건의했지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