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난설헌 2편
■ 허난설헌 2편
그렇다면 이달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양반의 혈통을 받았으나 어머니가 기생 출신 첩이어서 서자로 살았다. 이로 인해 그는 낮은 벼슬을 얻었다가 내팽개치고 방랑생활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술을 마시고 시를 토해냈다. 이렇게 하여 그의 시명(詩名)은 당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런 이달에게서 명문 자녀인 이들 남매가 시를 배웠던 것이다.
열 살이 좀 넘어 이달에게 시를 배운 뒤 그녀의 재능은 장안에 소문이 났다. 아름다운 용모와 재치, 그리고 뛰어난 시재(詩才)는 그런 명성을 얻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신동으로 일컬어졌고, 서울 양가의 딸들은 그녀와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녀는 여덟 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는 장편 시를 지었다. 이 글은 저 하늘의 신선이 산다는 백옥루에 대해 상상을 동원해 지은 것이다. 이 글이 언젠가부터 서울 장안에 나돌아 그녀의 시재는 더욱 인정받았다. 나중에 정조도 이를 읽고 감탄했다고 한다.
풍부한 정감은 그때그때 곧바로 시로 표현되었다. 그녀가 이렇게 시를 쏟아내면, 그녀보다 여섯 살 아래인 허균은 이를 애송했고, 뒷날 이 시들을 고스란히 옮겨 적어 후세에 전했다. 그녀의 시는 남동생 허균(許筠)덕택에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아버지 허엽말고도 그녀의 재능이 빛을 발하도록 도와준 사람은 오빠인 허봉이었다. 허봉은 일찍 과거에 합격해서 중국을 오가면서 유명한 시인들의 서책을 구해다 주었다. 허난설헌은 시를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조선사회의 유교적 관념을 벗어나 시대의 속박에 저항하고자 했다.
조선시대는 철저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회였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한 사회에서 부덕(婦德)이 높은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여성의 모범으로 꼽기도 했고, 바느질 잘하고 베 잘 짜는 여인을 훌륭한 여인상으로 꼽기도 했다. 그나마 조선 전기 여성은 고려 시대와 비슷한 지위와 권리를 누릴 수 있어서 남녀차별이 심하지 않았고, 재능을 펼치기가 쉬웠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 잡으면서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고, 그 능력을 펼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재능 있는 여성들에게는 더욱 가혹했던 시기가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여류문학가 하면 아마도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는 신사임당의 이름이 더 익숙하다. 물론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고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더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태어난 시기가 달라 그 운명이 엇갈린 듯 하다. 신사임당이 살았던 조선 전기에는 여자가 결혼을 해도 시집으로 가지 않고 친정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친정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히 마음도 편하고 시어른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재주를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재산도 남녀 차별 없이 물려받았고, 부모님 제사도 돌아가면서 지냈다. 반면, 조선 중기 이후에 태어난 허난설헌은 그렇지 못했다.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