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난설헌 5편
■ 허난설헌 5편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수많은 시를 썼으나, 죽기 직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남아서 전하는 것은 친정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허균이 수습한 213수의 시뿐이다. 누이가 죽은 이듬해인 1590년 허균은 친정에 남아 있던 누이의 시와 평소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를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허균(許筠)은 누이 허난설헌의 시집을 발간할 생각으로 이 원고를 당시 문호(文豪)였던 류성룡에게 보여 주었고, 류성룡은 그녀의 시를 크게 평가 하고 소중히 간직하여 반드시 후세에 전하도록 허균에게 조언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명이 조선에 원병을 파병했을 때, 그 군대와 같이 온 사신이 오명제였고, 사신 오명제를 맞이한 인물이 바로 허균(許筠)이었다. 조선의 시와 문장을 수집하고 있던 오명제에게 허균은 다른 조선 문인들의 시와 함께 허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건네주었다. 명나라로 돌아간 오명제는 1600년 이 시들을 모아 《조선시선》을 출판했고, 중국의 문인들은 허난설헌의 시를 보고 감탄하였고, 중국의 여류시인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시를 애송했다. 명나라의 시인 주지번은 《난설헌집》을 간행했다. 이 시집은 명에서 큰 호응을 얻은 뒤 조선으로 역수입되어 읽히기 시작되어, 국내에서도 그녀의 시는 시화(詩話)나 시평을 통해 널리 소개되었다. 어떤 시화에서는 격조 면에서 허봉이나 허균의 시가 모두 그녀의 시에 미치지 못한다고 극찬을 했다. 18세기 초 일본에서도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어 당대의 세계적인 여성 시인으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립더니..
가을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그녀의 시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원망과 한탄을 주로 노래했지만, 풍부한 시어와 언어 구사력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하는 한 천재적인 여인이 봉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해 재주를 마음껏 뽐내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 한시문학사의 큰 불행이다. 만약, 그녀가 좀 더 자유분방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면 아마 훨씬 아름다운 시를 더 많이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흔한 충효(忠孝)나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주제를 뛰어넘어 인간의 내면세계를 노래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시가 지닌 가치는 높다. 다만, 중국에서 발간된 그녀의 시들 속에 중국의 당시를 참고한 듯 한 부분이 일부 발견되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난설헌의 작품인가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그녀의 시집이 동생 허균에 의해 간행된 만큼 편집에 있어서 일부는 허균의 생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중기 여성에게 가장 혹독했던 시기에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녀의 뛰어남은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