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준과 동의보감 10편
■ 허준과 동의보감 10편
《동의보감》은 다른 의서들과 달리 책의 독자가 훨씬 더 다양하고 넓다. 의학 지식이 풍부한 의원뿐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백성이 쉽게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백성들은 병이 들고 아파도 의원을 찾아갈 수 없었다. 큰 병에 걸린 사람도 돈이 없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졌고, 전염병으로 곳곳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허준은 이렇게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의술을 펼쳤다. 《동의보감》은 백성들 스스로가 내 몸의 병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치료할 수 있게 해주었다. 허준이 훌륭한 의원으로서 더욱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단지 궁궐 안의 의사로서 왕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치료법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던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노년을 권세 없는 평범한 내의(內醫:내의원 의원)로 지내다 귀양에서 돌아온 지 6년 후인 1615년(광해 7년)에 일흔일곱의 나이로 조용히 삶을 마쳤다. 그의 사후(死後)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신하들의 반대로 보류되었던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했다.
허준은 임진왜란 때의 공신이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초상화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실전(失傳:잃어버려 알 수 없음.)되어 전하지 않는다. 허준의 실제 초상화로 추정되던 작품 또는 허준의 초상화로 전하던 작품이 1980년 초 양천 허씨 대종회에 입수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술인협회의 임원인 한의사 모 씨가 초상화에 허준이라 쓰여 있지 않으므로 가짜라고 하였다. 이 초상화는 뒤에 행방이 사라졌고, 사진이 전하고 있다.
그려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00년대 이전 누군가 허준을 상상하여 그린 상상 초상화가 전했으나 이 역시 사라지고 전하지 않는다. 현재의 허준의 표준초상화는 철종의 어진 복원에 참여한 최광수화백이 그린 상상화이다. 허준의 외모를 묘사한 것은 선조의 서녀 정안옹주의 남편인 분서 박미(汾西 朴瀰)의 분서집에 남아있는데, 허준의 외모에 대해 남긴 평으로는 허준은 비택(肥澤)하여 불교승려 모습과 흡사했고, 늘 입을 열면 옅은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허준에게는 외아들 허겸(許謙)이 있었다. 허겸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거쳐 이후 파릉군(巴陵君)에 봉작받았다. 이후 19대 숙종 때에는 그의 증손자 허진(許瑱)이 파춘군(巴春君)의 작호를 받았으며, 허진의 아들이자 허준의 고손자인 허육(許堉)은 양흥군(陽興君)의 작호를 받았다. 이렇게 누대에 걸쳐 후손들이 조정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선대가 살던 경기도 장단군 우근리(현재 경기도 파주시)에 대대로 거주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허준의 10대손 허도(許堵: 1827~1884)가 황해도 해주로 이주했으며, 13대 종손 허형욱(許亨旭:1924년생)이 1945년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이후 그의 직계 종손은 현재까지 북한에서 살고 있으며, 현재 남한의 양천 허씨 중 허준의 후손을 자칭하는 사람들은 사실 허준의 진짜 후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양천허씨 종친회에서 직접 밝히기도 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