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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0일 수요일

헤이그 특사 4편

■ 헤이그 특사 4편

■ 헤이그 특사 4편

표면적으로 고종의 특사 파견은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일제의 한국 침략을 가속화시킨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세계열강에게 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으며 일제의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최초로 알렸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들의 활동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과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고 국민의 반일감정을 촉발시켰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고종을 퇴위시킬 좋은 기회로 삼았다. 고종이 그동안 겉으로는 일본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궁내부를 통해서 각종 광산 채굴권을 이탈리아나 프랑스인에게 넘기는 등 일부 통치권을 계속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토히로부미는 7월 3일 일본 장교단을 거느리고 고종을 찾아가 협박한 후 이완용을 불러 헤이그 밀사는 을사조약의 위반으로 일본이 한국에 선전포고할 권리가 있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7월 6일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고종에게 일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고종은 자신은 아무 관계가 없고 그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 주장했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송병준은 고종에게 일본에 건너가 일황에게 사과하든가 대한문에 나가 일본 주차군사령관에게 항복하라고 윽박질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완용, 손병준, 박재순 등 내각대신들은 재차 양위를 요구했으며 심지어 이완용은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지르며 협박하자 고종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전한다. 사면초가에 몰린 고종은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으나 일제와 친일 내각은 억지로 양위식으로 둔갑시켜 고종을 몰아내기로 했다.

마침내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과 황태자가 모두 불참한 가운데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이병무, 이재곤, 조중응, 손병준 등 친일파가 주도하여 양위식이 열렸다. 고종은 양위(讓位)의 형식을 빌어 사실상 폐위(廢位) 당했다. 순종이 즉위하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여론이 들끓고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백성들은 통곡했고 친일 내각을 성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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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살아나면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한 이완용은 일제와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세권(稅權)과 재판권(裁判權)을 넘겼으며, 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도 작성하여 군대해산을 명문화했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가 군대해산을 주도하고 해산을 명령하자 대대장 박성환이 항의하며 자결했고, 격분한 병사들이 일본군을 향해 사격했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제에 저항할 마지막 수단을 모두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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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