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란胡亂 2편
■ 호란(胡亂) 2편
1627년 1월13일 새벽, 후금군의 선발대가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국경을 넘는 동안 의주 부윤 이완(李莞:1579~1627)은 제대로 방어도 못한 채 살해 되었고, 의주는 함락되었다. 이완(李莞)은 작은 아버지인 이순신 장군을 도와 노량해전에서 활약했던 이순신(李舜臣)의 조카였다. 후금은 일주일 후 얼음을 타고 청천강을 건너 안주로 내려왔다. 후금의 침략에 조선 조정은 당황했다.
장만을 도원수로 삼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면서 황해도 황주와 평산을 1차 방어선으로, 임진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았다.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는 분조(分朝:임시조정)를 맡아 전주로 내려갔다. 임진왜란 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평양에는 8000여 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후금의 기세에 놀라 대부분 성을 버리고 도망쳐버려 1월 24일 평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후금의 빠른 진격에 인조는 1월 27일 황급히 강화도로 피난길을 서둘렀다. 기마(騎馬)족인 후금군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강화부 관아에 임시정부를 차린 인조는 대신들과 대책 회의를 하면서 전쟁의 추이(推移)를 살폈다. 후금은 당시 명나라 정벌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라 강화도 공략이 쉽지는 않았다. 다행히 후금군은 평상에서 진군(進軍)을 멈추고 강홍립을 강화도로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서인 세력은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을 ‘강오랑캐’라 칭하며 최대의 모욕을 안겨줬지만, 후금 투항 이후에도 강홍립은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 강홍립은 후금 군대의 일원으로 조선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조선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해 화의(和議)를 맺는 데 기여했다.
후금은 화의 조건으로 조선의 만주 영토를 후금에게 줄 것,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명나라 토벌에 3만 군사를 지원할 것, 국경 일대에 시장을 열어 줄 것 등을 내걸었다. 이에 최명길 등이 강화 회담에 나서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으면서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을 앞세워 약조를 성립시키자 후금은 철군하였다. 이것이 정묘화약 (丁卯和約)이다. 후금은 애초부터 조선사대부들에게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컸으므로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물러난 것이다.
1627년 3월 3일 인조는 검은 옷을 입고 강화도 연미정 대청으로 나아가 후금과 형제 관계 서약식을 맺었다. 이렇게 정묘호란은 침략 후 약 50일 만에 종료됐다. 조선은 후금을 오랑캐니 야만인이니 하면서 우습게 여겼다가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수모를 겪게 되어버렸다. 더구나 후금군은 철수하면서도 끝까지 백성들의 목숨을 빼앗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벌였다. 그러나 정묘화약은 조선과 후금 두 나라가 다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관계를 굴욕적인 것으로 인식하였고, 더욱이 수시로 강요하는 후금의 과중한 경제적 부담에 반발하여 배금(排金)의 움직임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후금 역시 중강(中江)의 개시(開市) 등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공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 움직임이 날로 높아지는 데 불안을 느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