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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9일 화요일

호란胡亂 3편

■ 호란胡亂 3편

■ 호란(胡亂) 3편

청은 그 사이 명을 치기 위해 전선을 중국 전체로 확장했고, 군비부담이 늘어나자 수차례에 걸쳐 조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청의 이러한 요구는 지난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이 맺은 화의 조약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외교노선이 친명배금의 강경 일변도(一邊倒)로 치달았던 인조와 대부분의 서인세력은 이를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부 대신들 사이에서 친청(親淸)정책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대세는 아니었다. 청은 더 강성해진 국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대한 태도를 한층 더 강화시켜 고려 때 몽고가 조선에게 그랬듯이 형제관계가 아닌 부자관계인 전면적인 사대(事大)를 요구해왔다. 요동을 정벌하고 명 본토로 진격하기 위해서 청으로서는 배후의 불안 요소인 조선을 완전히 제압해 두어야 했던 것이다.

후금이 더욱 팽창된 세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군신(君臣) 관계를 요구해 옴으로써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걷게 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후금에게 굴욕을 당하고 이 후 사사건건 갈등이 증폭되자, 인조(仁祖)와 조정 대신들은 후금과의 일전(一戰)도 불사(不辭)한다는 움직임을 보였다.

관서지방군에 군량 4개월분을 실어 보내고, 청천강 이북의 산성에 5~6개월분의 군량미를 비축하도록 했다. 또 군사조직을 정비해 김시양을 도원수로, 정충신을 부원수로 삼았으며, 임경업(林慶業)을 북면방어사로 삼고, 남한산성을 최후의 방어성으로 지정해 정비토록 했다.

도원수 김시양과 부원수 정충신이 인조(仁祖)의 강경방침에 반대 의견을 내자, 인조는 둘을 해임해 버리고 그들보다 훨씬 모자란 간신 김자점(金自點)을 도원수로, 윤숙을 부원수로 임명했다. 이렇게 엉성하게 전쟁 준비에 들어간 인조(仁祖)는 국론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매일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가 죽을 둥 살 둥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인조(仁祖)는 그 가운데서 어정쩡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이 오직 명나라만을 섬겨야 한다는 대의명분 하나만 붙들고 소모적인 세월을 보내는 동안 후금(後金)의 침공은 눈앞으로 다가왔다.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자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의주, 안주, 평양, 황주, 평산을 주요 방어선으로 삼아 산성을 수축하고 병력을 집중 배치했다.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은 3,000의 병력을 이끌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갔고, 평안감사 홍명구와 유림은 평양 주둔군 3,000여명을 이끌고 자모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산성들은 큰 길에서 30~40리씩이나 떨어져 있어 적군이 큰 길로 진군해 오면 막을 수가 없었다.

대사간 윤황(尹惶)이 이러한 전략에 적극 반대하면서 인조(仁祖)에게 평양에 직접 나아가 적을 맞아 싸우면 온 나라의 군사와 충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적극책을 건의했다. 그러나 비겁한 인조는 적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으며, 육지에 남은 백성들의 안위 따위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2024년 3월 18일 월요일

호란胡亂 3편

■ 호란胡亂 3편

■ 호란(胡亂) 3편

청은 그 사이 명을 치기 위해 전선을 중국 전체로 확장했고, 군비부담이 늘어나자 수차례에 걸쳐 조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청의 이러한 요구는 지난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이 맺은 화의 조약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외교노선이 친명배금의 강경 일변도(一邊倒)로 치달았던 인조와 대부분의 서인세력은 이를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부 대신들 사이에서 친청(親淸)정책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대세는 아니었다. 청은 더 강성해진 국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대한 태도를 한층 더 강화시켜 고려 때 몽고가 조선에게 그랬듯이 형제관계가 아닌 부자관계인 전면적인 사대(事大)를 요구해왔다. 요동을 정벌하고 명 본토로 진격하기 위해서 청으로서는 배후의 불안 요소인 조선을 완전히 제압해 두어야 했던 것이다.

후금이 더욱 팽창된 세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군신(君臣) 관계를 요구해 옴으로써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걷게 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후금에게 굴욕을 당하고 이 후 사사건건 갈등이 증폭되자, 인조(仁祖)와 조정 대신들은 후금과의 일전(一戰)도 불사(不辭)한다는 움직임을 보였다.

관서지방군에 군량 4개월분을 실어 보내고, 청천강 이북의 산성에 5~6개월분의 군량미를 비축하도록 했다. 또 군사조직을 정비해 김시양을 도원수로, 정충신을 부원수로 삼았으며, 임경업(林慶業)을 북면방어사로 삼고, 남한산성을 최후의 방어성으로 지정해 정비토록 했다.

도원수 김시양과 부원수 정충신이 인조(仁祖)의 강경방침에 반대 의견을 내자, 인조는 둘을 해임해 버리고 그들보다 훨씬 모자란 간신 김자점(金自點)을 도원수로, 윤숙을 부원수로 임명했다. 이렇게 엉성하게 전쟁 준비에 들어간 인조(仁祖)는 국론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매일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가 죽을 둥 살 둥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인조(仁祖)는 그 가운데서 어정쩡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이 오직 명나라만을 섬겨야 한다는 대의명분 하나만 붙들고 소모적인 세월을 보내는 동안 후금(後金)의 침공은 눈앞으로 다가왔다.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자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의주, 안주, 평양, 황주, 평산을 주요 방어선으로 삼아 산성을 수축하고 병력을 집중 배치했다.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은 3,000의 병력을 이끌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갔고, 평안감사 홍명구와 유림은 평양 주둔군 3,000여명을 이끌고 자모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산성들은 큰 길에서 30~40리씩이나 떨어져 있어 적군이 큰 길로 진군해 오면 막을 수가 없었다.

대사간 윤황(尹惶)이 이러한 전략에 적극 반대하면서 인조(仁祖)에게 평양에 직접 나아가 적을 맞아 싸우면 온 나라의 군사와 충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적극책을 건의했다. 그러나 비겁한 인조는 적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으며, 육지에 남은 백성들의 안위 따위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