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란胡亂 5편
■ 호란(胡亂) 5편
청 태종은 사신들이 들고 간 국서에 조선이 아무런 응답이 없자, 이번에는 직접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 명 정벌에 앞서 배후가 될 수 있는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형제관계에서 더 나아가 군신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면서 조선을 더 압박해왔다. 조선의 조정은 두 파로 나뉘었다.
"오랑캐에게 또 다시 무릎을 꿇을 수 없다! 우리의 대의명분을 지켜야 한다." 라는 척화론(斥和論=주전파)과 "오랑캐라고 하나 우리보다 군사력이 강한 걸 무시할 수 없다.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라는 주화론(主和論)이 대립되어 있었다. 의리와 명분, 실리 중에 어떤 걸 선택해야 할까? 조선 조정에서도 대책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김상헌을 중심으로 청과 싸우자는 척화파(斥和派=주전파)와 화의를 맺자는 최명길 등의 주화파(主和派)로 국론(國論)이 갈렸다. 최명길은 윤집, 오달제 등 척화파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현실주의적인 주화파의 입장보다는 척화론이 대세가 되었다. 감정을 앞세우기에는 현실적으로 힘과 국력이 문제였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실리를 선택해야겠지만, 인조가 살던 17세기 조선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유학을 배우고 자란 그들은 의리와 명분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 결국 죽더라도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라는 생각으로 청(淸)을 배척하는 척화의 입장을 선택했다. 조선의 이러한 태도에 청 태종은 조선을 응징하고자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시작이다.
",청 태종 입장에서 정묘호란이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단지 위협만 주기 위한 전략적 전쟁이었다면, 병자호란은 명백하게 명나라로 편을 정한 조선을 징벌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명과 싸우며 전투를 통해 단련된 기마병을 중심으로 한 막강한 청나라 군사들은 압록강을 건넌지 5일 만인 12월14일 개성에 다다랐고 곧이어 한양으로 진군했다. 너무나 빠른 이 진군은 조선 왕이 강화도로 달아나는 것을 사전에 막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청군의 진군 속도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진격해 온 속도보다 훨씬 더 빨랐다.
조선은 수도를 목표로 돌진한 청의 기마병 중심 공격에 별다른 방어를 하지 못했다. 도원수 김자점은 정방산성에서 남하하는 청군과 맞섰다가 단번에 패배하고 도망가 버렸다. 평양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仁祖)는 강화도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이 퍼지자 강화도로 가는 길은 피난 가는 백성들로 인산인해였다.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지만 청군의 선발대는 이미 양화진 방면으로 진출해 강화도로 통하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결국 인조는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난길을 돌렸고, 재위 기간 동안 세 번(두 차례 호란과 한 번은 이괄의 난)이나 한양을 버리고 피난하는 불명예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