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란胡亂 7편
■ 호란(胡亂) 7편
청과 화의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해졌지만 김상헌, 윤집, 홍익한, 오달제 등은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하면서 항전(抗戰)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수도 없이 죽어 가고 있었다. 민족적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의 목숨은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만 한다.
결국 남한산성 내 식량이 떨어지고 그토록 믿었던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자와 비빈들을 비롯한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백성들의 죽음에는 꼼짝 안하던 인조와 대신들은 세자부부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농성 59일째가 되던 날, 청나라의 신하가 되는 조건을 포함한 11개조를 수락하며 항복했다.
1월 30일, 주화파 최명길(崔鳴吉)은 인조의 명을 받아 항복문서를 청 태종에게 전했다. 왕의 복장 대신에 융복(戎服:군복의 일환) 차림으로 서문을 빠져나온 인조는 참담하고도 비통한 표정으로 수항단(受降檀:항복을 받아들이는 단)이 마련된 삼전도(三田渡·:석촌호수 부근)로 향했다. 그곳에는 청 태종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곧이어 치욕적인 항복 의식이 행해졌다.
인조는 세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나라 군사의 호령에 따라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무릎 꿇고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림)’의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마쳤다. 원래는 중국의 항복 방식인 입에 옥구슬을 물고 망자(亡者)의 차림으로 항복의 예를 치루어야 하지만 청이 많이 봐 준 것(?)이다.
이 삼전도의 치욕 이후 조선은 청의 요구대로 신하의 예(禮)를 행하고 조공을 약속하는 한편, 명과 단교(斷交)하고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원병을 파병하기로 약조했다. 그리고 조선은 군사력을 늘릴 수 없으며, 군사훈련을 해도 안 되고, 성을 쌓거나 수리할 때는 꼭 사전에 청(淸)에 보고해야 했다. 또한 소현세자, 봉림대군, 삼학사(三學士:윤집·오달제·홍익한)를 비롯한 수많은 대신들이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갔다.
볼모로 끌려갈 당시 소현세자는 26세, 봉림대군은 19세였다. 주전론(主戰論)을 강력히 주장했던 삼학사는 청으로 끌려간 후 처형당했다. 이렇게 병자호란은 죄 없는 수십만의 백성들이 죽거나 수십만이 청에 잡혀갔고, 우리 역사상 듣도 보지도 못한 치욕을 당하고 끝났다.
청(淸)이 철군한 뒤에 조정에서는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반청(反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명을 치겠다는 청의 파병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인조는 쿠데타의 명분인 숭명대의(崇明大義)를 져버리고, 인조 18년인 1640년 상장 임경업(林慶業)과 황해병사 이완(李浣)이 이끄는 조선수군 6천명을 파병했다. 사령관 임경업은 대표적인 반청(反淸) 인사였다.
임경업의 수군은 전진하라고 해도 전진하지 않았고, 명의 수군을 만나도 발포하지 않았다. 가끔 발포하면 엉뚱한 데다 대고 쏘았고, 일부러 배를 부수고 일부 군사를 투항시키는 등의 행위로 청의 분노를 샀다. 청의 요청으로 임경업의 아내는 심양으로 끌려갔다가 자살했으며, 임경업은 청군에게 체포되어 압송되어 가다가 중간에서 탈출해 명(明)에 투항했다.
- 8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