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의장군 곽재우 6편
■ 홍의장군 곽재우 6편
조선 후기 주요 인물들의 삶을 좌우하게 되는 것은 당쟁이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갈등이었지만, 그 저변에는 학문과 혈연관계가 복잡하고 견고하게 얽혀 있었고, 그래서 그 영향과 파괴력은 넓고 깊었다. 곽재우도 당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조식의 외손사위라는 혼인관계가 보여주듯이 북인계 인물로 평가되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남인과 더욱 가까워졌다. 전란 동안 그를 계속 추천하고 인정한 인물도 김성일·유성룡·이원익 등 남인계 중신들이었다.
거대한 전란은 드디어 끝났다. 곽재우의 정치적 시련은 전란이 끝난 뒤에 닥쳤다. 그때 대부분의 인물이 그랬듯이, 그 시련은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내세워 스스로 초래한 것이었다. 첫 번째 사건은 1600년(선조 33년) 2월 붕당의 대립과 거기서 발생한 영의정 이원익의 파직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사직한 것이었다. 그는 국왕의 재가를 받지도 않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선조는 “장 1백 대에 멀리 유배 보내도 모자란다.” 면서 대노했다. 결국 그는 대북계 중진인 대사헌 홍여순(洪汝諄)의 탄핵으로 전라도 영암(靈巖)에 3년 동안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처음 겪은 주요한 정치적 시련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되지만, 그의 당색이 남인으로 정해지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1602년(선조 35년)에 유배가 풀려 현풍으로 돌아온 뒤 익힌 밥을 멀리하고 솔잎만 먹었다. 그리고 영산 창암(滄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했다.
국왕의 분노를 산 그가 공로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듬해 공신도감에서는 “경상우도가 보전된 것은 참으로 그의 공로”라면서 공신 책봉을 건의했지만, 선조는 곽재우의 공로뿐만 아니라 장수들의 활약을 전체적으로 각박하게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장수와 군사가 왜적을 막은 것은 양(羊)을 몰아 호랑이와 싸운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이 수전에서 세운 공로가 으뜸이고, 그밖에는 권율의 행주전투와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기대에 부응했으며 그 나머지는 듣지 못했다. 그 중에 잘했다는 사람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1603년 2월 12일).” 결국 곽재우는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
그 뒤 1605년(선조 38년) 2월에 그는 동지중추부사ㆍ한성부 우윤(종2품)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두 달 만에 병으로 사직한 뒤 줄곧 망우정에서 지냈다. 노년에 접어든 56세 때의 일이었다. 관계가 불편했던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재위: 1608 ~1623)이 즉위하면서 곽재우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