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담 서경덕 2편
■ 화담 서경덕 2편
서경덕은 스물다섯 살 때에 이미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30세 되던 중종 14년(1519년)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현량과(賢良科:관리추천제)를 실시하며 응시할 것을 권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거절하고, 그 대신 병약한 몸을 추스리기 위해 수년간 속리산·지리산 등을 유람하며 보냈다. 쌀이 떨어져 며칠씩 굶고 지내는 판인데도 조정의 녹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해 마흔 셋의 나이에 과거장으로 나갔고, 마침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을 하였다. 그러나 벼슬살이에 대비하기 위해 들어간 성균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어수룩한 행동과 촌스러운 몸가짐은 세련된 권문세가 자제들의 눈에 좋게 비쳤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성균관에서마저 뛰쳐나온 그는 벼슬을 포기한 채 개성으로 돌아와 송악산 자락에 있는 화담(花潭)에 자리를 잡았다. 화담 옆에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못 다한 학문에 정진한 것이다. 그리고는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화담 선생’이라는 별호(別號)가 그에게 붙여졌다. 그의 소문은 널리 퍼져 개성 일대는 물론이요, 서울에서까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1544년 말년에 후릉참봉(厚陵參奉:개성에 있는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지키는 벼슬) 벼슬을 받았지만 곧 사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른바 처사(處士)의 길,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서 은둔하는 선비의 길로 일관했다. 서경덕이 벼슬길에 나아가 역사와 현실에 참여하는 길이 아니라 뜻과 마음을 온전히 지키면서 은둔하는 길을 걸었던 것에는, 그가 살던 시대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서경덕이 9살 때인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시작으로 선비들의 대수난이 시작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잠시 조광조와 사림이 득세하기도 했지만,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다시 피바람이 부는 등, 극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소용돌이가 끊이질 알았다. 태생적으로 처사형 기질이 강했던 서경덕에게 그러한 현실은 더욱더 처사로서의 소신과 삶의 자세를 굳히게 만들었을 것이다.
화담 서경덕은 퇴계(退溪) 이황(李愰),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더불어 조선조 3대 성리학자로 꼽히는 사람으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체계화했으며, 성리학 외에 수학과 역학 등에도 통달한 대학자였다. 따라서 수많은 선비가 화담으로 찾아와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제자로는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있다. 황진이와의 일화가 널리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세(?)를 치르게 된 서경덕은 박연폭포(朴淵瀑布)·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