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진이의 남자들 1편
■ 황진이의 남자들 1편
조선시대에 기생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로는 황진이 외에도 성종 앞에서 문무백관을 쥐락펴락하는 시를 남겼던 소춘풍이 있고, 황진이 버금가는 실력으로 이름을 날린 매창도 있다. 그렇지만 인지도로 봤을 때 황진이만 한 인물을 찾기는 힘들다. 기생을 일컬어 흔히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꽃’이란 뜻으로 ‘노류장화’라 부르고,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황진이는 재능이 있으면 천민인 기생이라도 이름을 드높일 수는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황진이는 역사에 이름을 날린 것은 물론 후대에도 끊임없이 우리나라 대중문화에서 재해석되어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 등장함은 물론 대중가요로도 재탄생되고 있다.
개성(송도) 출신의 명기(名妓) 황진이의 본명은 황진(黃眞),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다. ‘–이’는 이름을 부를 때 붙는 접미사로 ‘황진이’가 된 듯하다. 그녀가 남긴 시조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한국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足跡)을 남겼다. 화려한 절경의 박연폭포, 고매한 인품과 절개를 가진 서경덕과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는 그녀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고, 간접사료인 야사(野史)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야사가 전하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는 많지만, 너무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 그 진위(眞僞)를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실존 인물인지 여부조차 불분명한 논개와는 달리 황진이는 그래도 실존 인물인 것은 분명하나, 어디까지가 진짜 황진이의 모습이고, 어디부터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를 가릴 길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당시 권세가들의 족보가 잘 보존되어 있는 것과 달리 황진이는 한 시대를 풍미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출생과 사망 연도 기록조차 없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다. 타고난 절색에 명창이었으며, 시재(詩才)에도 능해 당대 최고의 명기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녀는 당시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던 여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천부적 미모와 재주를 타고 났건만, 남녀차별과 신분차별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해 명월이라는 기생으로 일생을 보내야 했던 황진이였다. 남자 못지않게 빼어난 글재주를 지녔건만 여자로 태어나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었고, 신분이 천한 여자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니 정상적인 혼인으로 평온한 가정생활을 꾸려갈 수도 없었다. 이러한 숙명(宿命)이 황진이를 자존심 강한 당대의 명기로 만들고, 숱한 남성편력의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었으니, 이 또한 일종의 세상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고 스스로에 대한 보상심리가 아니었을까.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