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진이의 남자들 2편
■ 황진이의 남자들 2편
개성 명기 황진이는 시와 노래에 능하고, 용모도 빼어나게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고루한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왕조시대에 그것도 천대받던 기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명사들과 거리낌 없는 교분을 나누며 자유분방하게 살다간 비범한 여인이었다. 시‧서‧화‧창‧무(詩‧書‧畵‧唱‧舞)는 물론 아름다운 용모에 가야금과 거문고 등 악기연주능력 그리고 음주와 손님 접대 등 뛰어난 재능과 교양을 갖춘 개성이 낳은 만능 연예인이며, 당대 대표적인 예술인이었다.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지만,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것을, 황진이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40대에 죽었다고도 하고, 50대에 죽었다고도 하고, 믿기 어렵지만 60이 넘어 죽었다는 설도 있다. 틀림없는 사실은 황진이보다 30년쯤 연하인 백호 임제가 그녀의 무덤을 찾은 해가 선조 16년(1583년)이니, 그 이전에 죽었다는 점이다. 임제는 명종 4년(1549년)에 나주에서 태어나 29세 때인 선조 10년(1577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35세 되던 선조 16년에 평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개성을 지나게 되었다. 임제 또한 당대의 풍류 호걸이라 평소에 황진이를 만나고 싶었으나, 그는 너무 늦게 태어났고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사 들고 그녀의 무덤을 찾아간 임제는 술을 부어놓고 한바탕 통곡한 다음 그녀를 그리워하는 시 한 수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을 어듸 두고 백골만 무첫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이 소문이 금세 퍼져 임제는 선비의 몸으로 일개 천한 기생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통곡까지 했다는 점에서 사대부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부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일설(一說)에 불과하고 부임 1년 뒤에 서울로 돌아와 예조정랑을 지냈다고 한다. 어쨌든, 황진이는 그때까지 사회적으로 천대받기만 하던 기생의 존재를 존중의 대상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황진이를 가리켜 기생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기생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든 명기 중의 명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많은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