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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4일 일요일

황진이의 남자들 7편

■ 황진이의 남자들 7편

■ 황진이의 남자들 7편

지족선사는 깊은 산중 암자에서 불도(佛道)만 닦고 살았기에 참으로 이런 절색은 본 적이 없는지라 마치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여 자신의 수행을 시험해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지족선사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해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이것이 필시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둔갑한 여우가 틀림없어! 두려운 생각에 지족선사는 열심히 염주를 굴리며 속으로 쉴 새 없이 염불을 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지족선사의 30년 면벽수행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황진이에게 순식간에 30년 공든 수행의 탑이 무너져버린 지족선사는 그 뒤 실성한 사람이 되어 산을 내려와 황진이를 다시 만나려고 송도 거리를 미친 사람처럼 방황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황진이와 지족선사와의 이야기는 허균이 지은 <성웅지소록>에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도 나에게 무너졌다"는 황진이의 회고가 전부이다. 야사에 나오는 이 짧은 이야기로 사실 진위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황진이가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한 화담 서경덕이다. 당시 화담은 개성 영통동에서 북쪽인 박연폭포로 가는 길가 오른쪽 화담이라는 연못가 서사정(逝斯亭)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은거하고 있었다. 황진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높음을 듣고 승부욕(?)이 발동하여 서경덕에게 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유혹하였으나 넘어오질 않았다. 서경덕은 끝까지 의연하였다. 그래서 황진이는 이에 감탄하여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수련에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서경덕은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끝까지 나에게 이르지 않았으니 진정 성인(聖人)이다."라고 말하고, 서경덕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제자가 되었고 후대 사람들은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 이 세 사람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경덕이 세상을 떠나자, 황진이는 기생 일을 접고 은둔하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곡을 하지 말고 상여가 나갈 때 풍악을 울릴 것이며, 살아생전에 세상을 어지럽히고 남자들을 애태우게 한 죄가 있으니 관을 쓰지 말고 자신을 송도 밖의 모래밭에 그냥 던져서 까마귀밥이 되게 해 방탕한 여자들에게 경계로 삼으라고 했다는 유언이 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설"일 뿐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설이든 실제든 황진이가 까마귀밥이 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송도 사람들이 시신을 고이 안장하여, 현재 북한 장단 남정현 고개에 황진이의 묘가 있다. 묘비명은 한글로 "명월 황진이의 묘"라고 되어 있고, 북한에서 일반유적으로 지정되어 묘역도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다고 한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회석(宴會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진 것이 많고, 기생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 많을 것이다. 현전하는 작품은 5,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에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라는 시조라든지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어내어> 같은 시조들은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능에도 출제된 바가 있다. 황진이의 삶은 남성위주시대에 오히려 당당히 맞서며, 사랑은 언제나 본인이 선택하고 선도했다. 시화에 능하고 풍류를 알아 단순히 미모로 권력자에게 몸을 맡기고 이름을 날린 다른 미인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女人인 듯 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2024년 4월 13일 토요일

황진이의 남자들 7편

■ 황진이의 남자들 7편

■ 황진이의 남자들 7편

지족선사는 깊은 산중 암자에서 불도(佛道)만 닦고 살았기에 참으로 이런 절색은 본 적이 없는지라 마치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여 자신의 수행을 시험해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지족선사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해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이것이 필시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둔갑한 여우가 틀림없어! 두려운 생각에 지족선사는 열심히 염주를 굴리며 속으로 쉴 새 없이 염불을 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지족선사의 30년 면벽수행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황진이에게 순식간에 30년 공든 수행의 탑이 무너져버린 지족선사는 그 뒤 실성한 사람이 되어 산을 내려와 황진이를 다시 만나려고 송도 거리를 미친 사람처럼 방황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황진이와 지족선사와의 이야기는 허균이 지은 <성웅지소록>에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도 나에게 무너졌다"는 황진이의 회고가 전부이다. 야사에 나오는 이 짧은 이야기로 사실 진위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황진이가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한 화담 서경덕이다. 당시 화담은 개성 영통동에서 북쪽인 박연폭포로 가는 길가 오른쪽 화담이라는 연못가 서사정(逝斯亭)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은거하고 있었다. 황진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높음을 듣고 승부욕(?)이 발동하여 서경덕에게 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유혹하였으나 넘어오질 않았다. 서경덕은 끝까지 의연하였다. 그래서 황진이는 이에 감탄하여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수련에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서경덕은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끝까지 나에게 이르지 않았으니 진정 성인(聖人)이다."라고 말하고, 서경덕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제자가 되었고 후대 사람들은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 이 세 사람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경덕이 세상을 떠나자, 황진이는 기생 일을 접고 은둔하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곡을 하지 말고 상여가 나갈 때 풍악을 울릴 것이며, 살아생전에 세상을 어지럽히고 남자들을 애태우게 한 죄가 있으니 관을 쓰지 말고 자신을 송도 밖의 모래밭에 그냥 던져서 까마귀밥이 되게 해 방탕한 여자들에게 경계로 삼으라고 했다는 유언이 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설"일 뿐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설이든 실제든 황진이가 까마귀밥이 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송도 사람들이 시신을 고이 안장하여, 현재 북한 장단 남정현 고개에 황진이의 묘가 있다. 묘비명은 한글로 "명월 황진이의 묘"라고 되어 있고, 북한에서 일반유적으로 지정되어 묘역도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다고 한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회석(宴會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진 것이 많고, 기생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 많을 것이다. 현전하는 작품은 5,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에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라는 시조라든지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어내어> 같은 시조들은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능에도 출제된 바가 있다. 황진이의 삶은 남성위주시대에 오히려 당당히 맞서며, 사랑은 언제나 본인이 선택하고 선도했다. 시화에 능하고 풍류를 알아 단순히 미모로 권력자에게 몸을 맡기고 이름을 날린 다른 미인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女人인 듯 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