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희 2편
■ 황희 2편
황희는 관직에 들어선 뒤, 한 번의 유배와 두 번의 가벼운 파직을 겪었다. 그가 유배당한 것은 양녕대군의 폐위와 충녕대군(세종)의 세자책봉을 크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양녕대군이 적자이므로, 적자를 제치고 다른 아들로 세자를 삼으면 후세에 큰 환란의 불씨가 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는 또 양녕대군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고, 양녕의 두터운 친구이기도 했다. 이때 그는 파주 교하에 유배되었다. 가까운 곳에 두려는 태종의 배려였다. 하지만 그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고 대신들이 거듭 주장하자, 그의 조상 고향인 남원으로 유배지를 바꾸었다. 태종은 그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유배생활을 하도록 특전을 베풀었다. 그는 남원 유배지에서 3년을 보내면서 문을 닫아걸고 친구도 만나지 않으며 글 읽기에만 열중했다.
또 그가 파직된 것은 좌의정으로 있을 때, 그의 지인 태석균(太石鈞)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투옥되었을 때였다. 그는 사헌부에 태석균의 감형을 부탁했다는 죄로 잠시 파직되었다. 이 두 가지 경우 말고는 탄탄한 길을 걸은 셈이다.
세종은 자신의 세자책봉을 반대한 황희를 왕위에 오른 지 3년 뒤인 1422년 좌참찬으로 발탁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떠난 인사였다. 그 뒤 두 사람은 평생을 두고 공적으로는 군신의 관계였고, 사적으로는 둘도 없는 친구의 관계였다.
세종은 말년에 궁내에 부처를 모시는 내불당(內佛堂)을 조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은 유교정치 이념을 표방하는 국가이므로 세종의 내불당 조성은 큰 반대에 부딪쳤다. 집현전 학사들은 일제히 업무를 접고 귀가하는 요즘으로 치면 파업을 벌였다. 이에 마음이 상한 세종은 텅 빈 전내(殿內)를 휘둘러보며 옆에 있던 황희(黃喜)에게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다. 이에 황희는 집현전 학사들을 달래 끝내 내불당을 조성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렸고, 세종의 정책에 둘도 없는 조력자가 되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즈음 선비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을 때에도, 또 천첩 소생들에게 비천한 일을 면제하는 조치를 내리려 하여 양반들이 반발할 때에도 세종을 돕고 이해하고 감쌌던 인물이었다.
황희가 죽었을 때 사관은 이렇게 평가했다. 인물평가에 짠 사관이 남다른 찬사를 한 것이다.
『성품이 관후하고 신중하여 재상으로서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모습이 풍만해 특출하였고 뛰어나게 총명했다. 가정을 다스림에는 검소했고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일을 따질 때에는 공명정대하여 원칙을 살리기에 힘썼으며 마구 뜯어고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 《문종실록》 권12, 2년2월조 -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