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종 5편
■ 효종 5편
당시는 중원을 정복한 청나라의 힘과 기세가 하늘을 찔러 조선이 청나라를 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말이 되지 않던 시기였다. 효종은 격변의 시대에 8년간 이역 땅에서 청나라가 중원을 정복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등 온갖 경험을 했다. 귀국해서는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의 죽음 등 정치의 비정함까지 두루 지켜 본데다, 세자에 책봉된 이후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을 우려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이미 떠 있는 해라 할 수 있는 청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정말로 추진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이 가지 않는다.
더욱이 북벌의 파트너라는 송시열은 효종의 거듭된 출사(出仕) 요구를 거절하다가 말년에야 올라왔고, 재직기간도 겨우 10개월에 불과하였다. 실록을 보면, 송시열이 그 기간 동안 효종에 대해 수신제가를 강조하는 진언을 한 것이 다소 나타나고 있을 뿐, 북벌에 관한 어떤 계책이나 사대부 사회를 향한 개혁 요구 등 북벌과 관련한 어떤 발언도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군역의 폐해가 극에 달해 백성의 원망이 컸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북벌을 위한 군사력 강화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송시열은 효종과 더불어 북벌을 추진하기는커녕 북벌과 전혀 무관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효종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도대체 왜 북벌하면 효종과 송시열이고, 효종과 송시열 하면 북벌이라는 등식이 마련된 것일까? 이 같은 등식이 마련된 결정적 근거는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獨對)이다. 1659년 3월 효종은 승지와 사관을 모두 물리치고 송시열과 단독으로 면담을 했다. 북벌을 어떻게든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실록에서는 독대한 상황만 기록했지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돼 있지 않지만 송시열은 이날 북벌에 대한 긴밀한 논의가 이뤄졌음을 자신의 문집 ‘악대설화(幄對說話)’에서 증언하고 있다.
『오랑캐(청)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오랑캐를 물리칠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므로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효종(孝宗)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현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결의에 찬 효종의 북벌정책에 맞장구는커녕, 성리학적 본질에 치우쳐 격물(格物)과 치지(治知)를 이야기하며 치국(治國) 이전에 수신(修身)이 먼저라고 했다. 마음 수양과 민생안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송시열 북벌론의 근거는 명에 대한 사대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淸)에 대해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복수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북벌론(北伐論)은 목표는 같았지만 목적이 달랐다. 두 사람의 북벌론은 동상이몽 (同床異夢) 그 자체였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