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선언서 1편
■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선언서 1편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하며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선언서』를 소개한다. 우리나라의 해방 과정에서 너무나 아쉬운 점은 식민통치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은 수없이 많은 사람의 희생을 치러가면서도 끝임없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스스로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본은 우리나라가 아닌 연합국을 상대로 항복을 선언해 버렸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연합국 각국의 이해관계 앞에 실질적인 독립국으로서 우리나라의 실익은 뒷전이 되고 말았다. 강대국의 힘의 논리 앞에 우리는 또 다시 국토가 분단되는 슬픈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고, 아직도 진행형이다.
1945년 7월 17일 제2차 세계대전 주요 승전국의 대표들로 해리 S.\xa0트루먼\xa0미국 대통령, 윈스턴\xa0처칠\xa0영국 총리(7월 26일 제43대 클레멘트 애틀리가 영국 총리로 당선되고 교체), 요시프\xa0스탈린\xa0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 미·영·소 정상 3명은 독일 왕실의 휴양지인 브란덴부르크주 포츠담 체칠리엔 호프궁전에 모였다. 승전국 대표들의 관심은 각각 달랐다. 영국은 패전국\xa0독일의\xa0통치 방법과 배상금 문제, 러시아는 동유럽에서 러시아의\xa0역할,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 종결과 그 사후 처리 등으로 3국은 제각기 자기 국가의 이익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7월\xa026일\xa0협상을 하던 미국의 해리 S.\xa0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에게\xa0무조건\xa0항복의 최후통첩을 영국 총리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7월 26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임기가 끝나서 영국으로 돌아가고, 새로 총리가 된 클레멘트 리처드 애틀리 영국 총리가 도착했다.
일본에게 최후통첩을\xa0보낼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본토로부터 원자폭탄을 완성했다는 보고를 받고 8월 6일\xa0일본 본토 히로시마시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이어서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시에도 원자폭탄을\xa0떨어뜨렸다. 그리고 미국은\xa08월 9일 일본에게 무조건\xa0항복할\xa0것을 요구하자, 소련은 일본과의 사할린 영토문제를 매듭짓는데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급히 일본에게 선전 포고를 하고는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8월\xa010일\xa0내각회의를 열고 항복을 결정하고는 중요 관서(官署)의 수장들과 침략국 총독부에 이를 통보하고, 항복하기 전에 일본국 국민들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받는 대책을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 8월\xa014일\xa0일본은 미국, 영국, 소련, 중국에게\xa0항복할 것을 통보하고, 그 날 몇 번의 수정을 거쳐서 항복 문서를 완성하여 밤 11시 20분부터 NHK방송국 운영진 8명의 도움을 받아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 裕仁) 쇼와(昭和) 일본 국왕의 임시 거처인 도쿄에 있는 후키아게 정원 내의 문고(文庫) 3층에 녹음시설을 설치하고, SP 레코드판 2장에 히로히토 일왕의 목소리로 항복문서 5분 분량을 녹음했다. 다음 날인 8월\xa015일\xa0낮\xa012시\xa0NHK 방송국은 SP판에 녹음한 히로히토의 항복\xa0선언문을 라디오를 통해서 발표하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