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명의 이순신 2편
■ 2명의 이순신 2편
1589년(선조 22년)에 함경도 혜산진첨사(惠山鎭僉使)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침략을 막으러 나갔으나 부임 도중 병이 나서 적군의 침입을 제대로 막지 못하여 상사로부터 문책을 받았으나, 선조가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 징계를 면했다. 그러나 상사와의 불화가 계속되자 결국 선조는 그를 파직하여 귀양보냈다. 2년 후, 일본의 침입 움직임이 있자 재등용되어 1591년(선조 24년)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관할인 방답진첨사(防踏鎭僉使)로 부임하게 되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전선(戰船) 제작에도 참여하여 자문하였고, 관내의 성지(城池)를 정비하고 기계(機械)와 축성 제작에도 전력을 다함으로써 망루(望樓)와 군기영기(軍旗令旗)들이 일제히 정비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그는 충무공의 막하 중위장(中衛將)으로 첫 해전인 옥포·합포해전 때부터 출전해 대활약을 했다. 첫 전투일인 1592년 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막 끝낸 뒤에 합포로 도망친 5척의 일본군 전선(戰船) 대선(大船) 1척을 무의공 이순신이 파괴했다. 5월 8일 적진포에서도 일본군 대선 1척을 파괴했다. 이순신이 2차 출전했던 1592년 5월 29일에는 하동 선창에 있는 일본군 전선을 불태워 없앴다. 6월 6일에는 무의공 이순신이 충무공 이순신에게, “산에 올라간 일본군이 반드시 당항포에 남겨둔 배를 타고 새벽에 몰래 나올 것이니, 그들을 바다에서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충무공 이순신은 무의공의 전략에 따랐고, 무의공은 배를 타고 도망치던 일본군을 공격해 파괴했다. 1592년 9월 1일 부산해전에서도 무의공 이순신은 선봉장으로 참전해 일본군 대선을 파괴했다.
그런 공로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수들과 달리 무의공 이순신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무의공 이순신의 공로가 묻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충무공 이순신은 조정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많은 장수들 중에서도 순천 부사 권준, 광양 현감 어영담, 흥양 현감 배흥립, 녹도 만호 정운, 그리고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 등은 특별히 신뢰할 수 있어 함께 죽기를 약속하고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권준과 다른 장수들은 모두 당상관((堂上, 정3품 절충장군 이상)으로 승진했는데, 이순신(李純信)만이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이순신(李純信)은 호남 영남 개전 이래 10회에 걸쳐 1회는 중군(中軍)을, 9회는 선봉을 맡아서 오직 적의 기세를 꺾는 데 전념하느라고 적의 수급(首級)을 모아 공적을 자랑할 겨를이 없기에 특별히 앞세워 상계(上啓)했건만 논공(論功)이 홀로 순신(純信)에게 미치지 못하여 유전지공(有戰之功) 무전지상(無戰之賞)이라는 군심(軍心)의 원망이 있습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