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명의 이순신 3편
■ 2명의 이순신 3편
충무공 이순신의 보고를 받은 선조는 무의공 이순신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 특진시켰고, 1594년(선조 27년) 충청도수사(忠淸道水使)로 임명했다. 충청수사 재직 중 군율을 매우 엄히 적용했는데, 왕명을 받고 파견된 왕명특사(王命特使)는 무의공 이순신이 군율을 너무 엄격하게 한다며 형벌과중(刑罰過重)으로 보고하였고, 보령(保寧) 토호 김태국(金泰國)이 사노(私奴) 한손(漢孫)을 시켜서 낸 고변(告變)도 조정에 보고되자, 구금(拘禁)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1595년(선조 28년)에 다시 풀려나 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로 강등되어 임명되었다.
그 후 무의공 이순신은 1594년에는 충청 수사로, 1597년에는 명량해전이 끝난 직후 경상 우수사에 임명되었다. 1598년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에도 중위장으로 참전해 충무공과는 임진왜란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제독 진린에 의해 충무공 이순신의 뒤를 이을 통제사로 천거를 받기도 했다. 1599년(선조 32년) 1월에 수사직을 물러나서 포도대장 겸 도총사 총관에 임명되었으며, 1600년(선조 33년)에 충청수사 · 수원부사 · 경상부사를 역임하였다. 1601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재물을 탐한 죄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1602년(선조 34년) 창원부사로 부임했다. 1604년 첨지부사가 되었고,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604년부터 전라방어사·수원부사·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전라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고, 이후 포도대장,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611년(광해군 3년) 9월 2일에 59세로 별세하여 현재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현 광명시 일직동)에 장사(葬事)되었다. 인조 때 의정부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고, 1679년(숙종 6년)에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제수 받았다. 무의공 이순신의 묘는 1987년 9월 10일 광명시의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던 무의공 이순신을 신뢰했고, 국난극복을 위해 함께 목숨을 걸었다. 무의공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과 임진왜란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며 눈부신 활약을 했다. 충무공이 있는 곳에 무의공이 있었고, 무의공이 있는 곳에 충무공이 있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