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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6일 토요일

400년을 뛰어넘은 사부곡思夫曲 1편

■ 400년을 뛰어넘은 사부곡思夫曲 1편

■ 400년을 뛰어넘은 사부곡(思夫曲)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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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안동시 정상동의 택지조성 과정 중에 무연고 분묘(墳墓)가 발견되었다. 주인 없는 무덤이었기에 발굴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나, 발굴을 위해 무덤의 외관 뚜껑을 연 순간 ‘철성이씨(고성 이씨의 옛 이름)라 적힌 명정(銘旌:다홍바탕에 흰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와 관직 성씨를 적은 천)이 나왔다. 무덤의 주인을 찾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고, 고성 이씨 ’이응태‘의 분묘로 밝혀졌다. 곧이어 고성 이씨 문중에 알려졌고, 문중 입회하에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응태의 시신은 미라 상태였다. 머리카락, 수염까지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을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시신의 주변에서 총 18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편지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중 <원이엄마 편지>는 예외였다. 무덤 속 시신의 가슴 위에 올려 진 한글로 쓰인 이 편지는 이응태의 시신처럼 잘 보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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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년 6월 1일, 편지의 주인공인 이응태는 명종 11년에 태어난 안동에서 손꼽히는 무반 가문의 자제였다. 발굴 당시 그의 키는 180센티에 무척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586년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로 어린 아들과 임신 한 아내를 두고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어린 자식과 임신한 몸으로 남은 아내의 심정은 어땠을까. 남편의 장례를 앞두고 아내는 붓을 들어 남편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 슬픔을 한지 위에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을 것이다. 가로 58.5cm, 세로 34cm의 종이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절실한 심정으로 빈 곳 없이 가득 찼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종이가 부족하자 아내는 종이를 돌려 모서리, 여백에 다시 글을 써 내려간다. 이 편지 속에는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내의 슬픔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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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엄마 편지>는 4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썩지 않고 거의 완벽히 보존되었고, 남편을 향한 아내의 사랑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무덤 속에 들어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빛을 보게 된 이 편지는, 가볍고 얕은 사랑이 일상화한 지금 우리 시대에 잔잔하면서도 큰 울림으로 다가와 가슴을 친다.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안타깝게 떠난 남편의 뒤를 자신도 따르고 싶다는 내용의 원이엄마 편지는 세인들에게 400여년의 사랑이라는 눈물겨운 감동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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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선 아들 원이가 입던 옷(저고리)과 원이 엄마의 치마도 나왔다. 형(이몽태)이 동생에게 쓴 한시 『울면서 아우를 보낸다.』와 형이 쓰던 부채에 적은 ‘만시(輓時)’도 있었고, 이응태가 부친과 주고받은 편지도 여러 통 발견됐다. 발굴된 의복은 40여벌에 이른다. 부친과 나눈 편지엔 전염병 관련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무덤의 주인은 당시 전염병을 앓다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건 이응태가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는 걸 뜻한다. 당시(임진왜란 전)엔 결혼하면 시댁살이와 함께 처가에 가서 사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는 걸 뜻한다. 임란 전엔 재산 분할도 아들딸 차별이 없었다. 이런 인식은 편지에도 드러나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