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8일 토요일

고마워요, 내 사랑

고마워요, 내 사랑

고마워요, 내 사랑

이 넓은 세상 가운데에서

그대를 알게 된 것

고마워요

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고마워요

오늘도 건강한 모습으로

씩씩한 그대

고마워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드시는 그대

고마워요

지금 이 순간 나처럼

숨 쉬고 있는 그대

고마워요

살아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감사해요

내 사랑 고마워요

그대 생각하며

행복해질 수 있게

해주셨으니

고마워요

그런 그대

계셔서 난 마냥

즐거워요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요

그대에게 나는..

무얼 해드리죠..

눈물 나게 고마운

나의 사랑아!

"

-장세희, 고마워요, 내 사랑-

"

사랑 우산

사랑 우산

사랑 우산

사랑으로

우산을 만들겠습니다.

만든 우산을

당신에 선물하겠습니다.

외로움도 가리고

슬픔도 가리고,

힘듦도 가리고

아픔도 가릴 수 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햇빛 좋은 날에도

늘 쓰고 다닐 수 있게

사랑으로 만들겠습니다.

그 우산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이미 나의 우산입니다.

-세상에 그저 피는 꽃은 없다 사랑처럼-

신종추원ㅣ愼終追遠

신종추원ㅣ愼終追遠

신종추원ㅣ愼終追遠

○ 부모의 장례를 엄숙히 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다.

○ 愼(삼갈 신) 終(마칠 종) 追(쫓을 추) 遠(멀 원)

마지막 자리를 편안하게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동양에서는 부모의 장례를 엄숙히 치르고(愼終), 역대의 선조를 추모하여 제사를 정성들여 지냈다(追遠). ‘論語(논어)’에서 曾子(증자, 기원전 505~436)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름이 曾參(증삼)인 증자는 학문이 깊어 孔子(공자)의 高弟(고제)로 도를 계승했고, 그의 가르침은 孟子(맹자)에까지 전해져 동양 五聖(오성)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學而(학이)편에 나오는 부분을 보자. ‘초상을 당해서는 장례를 신중하게 치르고, 먼 조상의 제사에도 정성을 다하면 백성들이 모두 두터운 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신종추원 민덕귀후의).’ 終(종)은 죽음, 遠(원)은 먼 선조를 말한다. 현재 자신이 지닌 것은 모두 부모를 비롯한 조상의 은덕이므로 이들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자세라고 가르친다.

증자는 二十四孝(이십사효)의 한 사람에 들 만큼 효성도 지극하여 孝經(효경)을 지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이렇게 강조해도 어울린다. 그는 어렸을 때 계모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자랐지만 어머니를 섬기는 효성은 지극했다. 부모님 상에 올리는 콩잎을 설익혀 먹지 못하게 했다고 증자는 아내를 내쫓고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할 정도다. 황당하게 여겨져도 烝黎出妻(증려출처, 黎는 검을 려 또는 명아주 려)란 고사로 남았다.

괄목상대ㅣ刮目相對

괄목상대ㅣ刮目相對

괄목상대ㅣ刮目相對

○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대하다

○ 刮(비빌 괄) 目(눈 목) 相(서로 상) 對(대할 대)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대하다, 남의 학식이나 재주가 놀랄 만큼 부쩍 늘었다는 것을 뜻한다.

"

삼국시대(三國時代) 초엽, 오왕(吳王) 손권(孫權:182∼252)의 신하 장수에 여몽(呂蒙)이 있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전공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어느 날 여몽은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지(戰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卷(수불석권) 학문에 정진했다. 그 후 중신(重臣) 가운데 가장 유식한 재상 노숙(魯肅)이 전지 시찰 길에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다.

",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진 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오나라에 있을 때의 여몽이 아닐세非吳下阿蒙\그려."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무릇 선비란 헤어진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땐 \눈을 비비고 대면할刮目相對\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

재상 노숙이 병사(病死)하자 여몽은 그 뒤를 이어 오왕 손권을 보필, 국세(國勢)를 신장하는데 힘썼음. 여몽은 촉(蜀) 땅을 차지하면 형주荊州:호남성(湖南省)를 오나라에 돌려주겠다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유비(劉備)의 촉군(蜀軍)을 치기 위해 손권에게 은밀히 위(魏)나라의 조조(曺操)와 화해 제휴할 것을 진언, 성사시키고 기회를 노렸음.

그러던 중 형주를 관장하고 있던 촉나라의 명장 관우(關羽)가 중원(中原)으로 출병하자 여몽은 이 때를 놓이지 않고 출격하여 관우의 여러 성(城)을 하나하나 공략(攻略)한 끝에 마침내 관우까지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움으로써 오나라의 백성들로부터 명장으로 추앙을 받았음.

백중지세ㅣ伯仲之勢

백중지세ㅣ伯仲之勢

백중지세ㅣ伯仲之勢

○ 서로 어금버금한 형세

○ 伯(맏 백) 仲(버금 중) 之(어조사 지) 勢(세력 세)

서로 어금버금한 형세, 같은 부모의 형과 누님을 백부와 백모라 하고, 동생과 누이동생을 숙부와 숙모라고 부르는 것은, 옛날부터의 중국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

중국에서는 형제의 순서를 다시 세분하여, 伯 . 仲 . 叔 . 季로 부르고 있다. 어려서 이름을 짓고, 관례(冠禮)를 하고서 자(字)를 붙이고, 50에 백중(伯仲)으로써 하고, 죽으면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은 주(周)나라의 도리이다. 즉, 어린이가 태어나면 3개월 만에 이름을 짓고, 20세가 되면 손님들을 초대하여 관(冠)을 씌우고, 자(字)를 짓는다. 50세가 되면 자(字) 위에 伯 . 仲 등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고, 죽으면 諡號를 내린다.

",

이것이 周나라의 관습이었던 것이다.<伯仲>이란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형제는 비슷하게 닮았기 때문에, 비교 평가하여도 서로 우열(優劣)을 가릴 수 없을 때, <그들은 伯仲之間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伯仲之間이란 말을 처음에 쓴 것은, 魏나라의 文帝 조비(曹丕)였다.文人들이 서로 가볍게 여기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했다. 부의(傅儀)와 반고(班固)에 있어서는 백중지간일 뿐이다.

관포지교ㅣ管鮑之交

관포지교ㅣ管鮑之交

관포지교ㅣ管鮑之交

○ 시대를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

○ 管(대롱 관) 鮑(절인 고기 포) 之(갈 지) 交(사귈 교)

옛날 중국(中國)의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처럼 친구(親舊) 사이가 다정(多情)함을 이르는 말로 ①친구(親舊) 사이의 매우 다정(多情)하고 허물없는 교제(交際) ②우정(友情)이 아주 돈독(敦篤)한 친구(親舊) 관계(關係), 허물없는 친구(親舊) 사이를 이르는 말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은 죽마고우로 둘도 없는 친구(親舊) 사이였다. 어려서부터 포숙아(鮑叔牙)는 관중(管仲)의 범상(凡常)치 않은 재능을 간파(看破)하고 있었으며, 관중(管仲)은 포숙아(鮑叔牙)를 이해(理解)하고 불평(不平) 한마디 없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벼슬길에 올랐으나, 본의 아니게 적이 되었다. 규의 아우 소백(小白)은 제(齊)나라의 새 군주(君主)가 되어 환공(桓公)이라 일컫고, 형 규(糾)를 죽이고 그 측근이었던 관중(管仲)도 죽이려 했다. 그때 포숙아(鮑叔牙)가 환공(桓公)에게 진언(盡言)했다. 「관중(管仲)의 재능은 신보다 몇 갑절 낫습니다. 제(齊)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滿足)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합니다만 천하(天下)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관중(管仲)을 기용하셔야 하옵니다.」

환공(桓公)은 포숙아(鮑叔牙)의 진언(盡言)을 받아들여 관중(管仲)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政事)를 맡겼다. 재상(宰相)이 된 관중(管仲)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마음껏 수완을 발휘해 환공(桓公)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패자(覇者)로 군림하게 했다. 성공(成功)한 후 관중(管仲)은 포숙(鮑叔)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다음과 같이 회고(回顧)하고 있다. 「내가 젊고 가난했을 때 포숙(鮑叔)과 함께 장사를 하면서 언제나 그보다 더 많은 이득(利得)을 취했다.

그러나 포숙(鮑叔)은 나에게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몇 번씩 벼슬에 나갔으나 그때마다 쫓겨났다. 그래도 그는 나를 무능(無能)하다고 흉보지 않았다. 내게 아직 운이 안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싸움터에서 도망(逃亡)쳐 온 적도 있으나 그는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공자 규가 후계자 싸움에서 패하여 동료 소홀(召忽)은 싸움에서 죽고 나는 묶이는 치욕(恥辱)을 당했지만 그는 나를 염치(廉恥)없다고 비웃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기 보다 공명을 천하(天下)에 알리지 못함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父母)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鮑叔牙)다.

동여탈토ㅣ動如脫兎

동여탈토ㅣ動如脫兎

동여탈토ㅣ動如脫兎

○ 덫에서 달아나는 토끼처럼 움직이다, 동작이 신속하다.

○ 動(움직일 동) 如(같을 여) 脫(벗을 탈) 兎(토끼 토)

토끼란 동물은 커다란 눈으로 껌벅이며 주위에 두려움을 많이 탄다. 토끼가 나오는 성어 중에서 여우와 같이 교활한 면이 있다고 한 狡兎三窟(교토삼굴)은 앞날을 대비한 지혜를 말한다, 나무에 부딪쳐 죽는 토끼를 어리석다고 한 守株待兎(수주대토)도 농부가 더 어리석다. 이러한 말보다 더 와 닿는 것이 재빠른 토끼다. 犬兎之爭(견토지쟁)에서 천하에서 제일 빠른 사냥개를 산기슭을 세 바퀴나 돌고 산꼭대기를 다섯 번이나 오르내리며 대등하게 달렸다. 결국 둘 다 농부에 잡히는 신세가 되지만 달리기엔 이름을 남겼다.

토끼의 이런 속성을 春秋戰國(춘추전국) 시대의 전략가 孫武(손무)가 병사들의 임전태세에 대해 말하면서 인용했다. 중국 고대의 여러 병법서 중에서도 가장 걸출하다고 평가되는 ‘孫子兵法(손자병법)’의 제11 九地篇(구지편)에서다. 지형지세에 따른 아홉 가지 공격과 방어 전술을 기록하고 있는 장이다. 전장에 나가서는 속임수도 사양하지 않는 계책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대로 여기서도 교묘하게 작전을 성사시켜야 한다고 했다. 원정에 나섰을 때 관문을 봉쇄하고 적진 깊숙이 잠입했다가 결전의 날을 기다린다. 이럴 때 움직이는 것을 마치(動如) 토끼처럼 재빨리 하라(脫兎)고 표현했다.

비유하면서 처녀도 등장하는 부분을 보자. ‘처음에는 마치 처녀처럼 조용히 행동하지만, 적군들이 문을 열면 토끼가 덫에서 벗어나듯 공격하여 상대가 항거할 수 없게 만든다(始如處女 敵人開戶 後如脫兎 敵不及拒/ 시여처녀 적인개호 후여탈토 적불급거).’ 처음에는 처녀처럼 준비태세를 갖추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다가 적이 틈을 보이면 도망치는 토끼처럼 신속하게 덮쳐야 승리한다. 여기서도 기만술과 속도전이 그대로 드러난다. 같은 말로 處女脫兎(처녀탈토), 脫兎之勢(탈토지세)가 있고 靜如處女(정여처녀)는 물론 반대의 뜻이다.

배중사영ㅣ杯中蛇影

배중사영ㅣ杯中蛇影

배중사영ㅣ杯中蛇影

○ 술잔 속에 비친 뱀의 그림

○ 杯(술잔 배) 中(가운데 중) 蛇(뱀 사) 影(그림자 영)

술잔 속에 비친 뱀의 그림자, 쓸데없는 의심을 품고 스스로 고민함의 비유

진(晉:265∼316) 나라에 악광(樂廣)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독학을 했지만 영리하고 신중해서 늘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훗날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역시 매사에 신중했다. 악광이 하남 태수(河南太守)로 있을 때의 일이다. 자주 놀러 오던 친구가 웬일인지 발을 딱 끊고 찾아오지 않았다. 악광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찾아가 물어 보았다. "아니, 자네 웬일인가? 요샌 통 얼굴도 안 비치니……."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저번에 우리가 술을 마실 때 얘길세. 그때 술을 막 마시려는데 잔 속에 뱀이 보이는 게 아니겠나.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냥 마셨지. 그런데 그 후로 몸이 좋지 않다네. "악광은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번 술자리는 관가(官家)의 자기 방이었고, 그 방 벽에는 활이 걸려 있었지? 그렇다. 그 활에는 옻칠로 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안광은 그 친구를 다시 초대해서 저번에 앉았던 그 자리에 앉히고 술잔에 술을 따랐다. "어떤가? 뭐가 보이나?" "응, 전번과 마찬가지네." "그건 저 활에 그려져 있는 뱀 그림자일세. "그 친구는 그제서야 깨닫고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임연선어ㅣ臨淵羨魚

임연선어ㅣ臨淵羨魚

임연선어ㅣ臨淵羨魚

○ 연못 가까이서 고기를 부러워하다

○ 臨(임할 임) 淵(못 연) 羨(부러워할 선) 魚(물고기 어)

물고기가 많이 뛰노는 연못가에서(臨淵) 하염없이 앉아 입맛을 다시며 부러워해도(羨魚) 헛물만 켠다. 조금 천천히 잡더라도 집에 돌아가서 그물을 짜는 것이 물고기를 더 빨리 잡는 길이다. 바라기만 하고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무엇이 이루어질까. 헛된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는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실천하는 것이 유익하다. 우리 속담을 인용하면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거나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등등이 들어맞는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 마련되었거나 손쉬운 일이라도 힘을 들여 이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란 뜻이다. 부러워할 羨(선)은 군침을 흘린다는 본뜻이 있는데 羨望(선망)으로 많이 쓴다. 이 성어는 약간씩 다른 표현으로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중국 前漢(전한)의 淮南王(회남왕) 劉安(유안)이 저술한 책 ‘淮南子(회남자)’ 說林訓(설림훈)에는 ‘물의 근원을 막는 사람은 목이 마를 것이고, 근본을 등지는 사람은 몸이 마를 것이다.

강가에 서서 고기를 부러워하는 것보다는 집으로 돌아가 그물을 짜는 것만 못하다(塞其源者竭 背其本者枯.. 臨淵羨魚 不如歸家結網/ 색기원자갈 배기본자고.. 임연선어 불여귀가결망).’前漢(전한)의 유학자 董仲舒(동중서)가 武帝(무제)에게 올린 ‘賢良對策(현량대책)’에서는 똑같은 뜻으로 ‘옛사람의 말에 연못가에 앉아 물고기를 부러워하는 것은 물러나서 그물을 짜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古人有言曰 臨淵羨魚 不如退而結網/ 고인유언왈 임연선어 불여퇴이결망)’라고 했다.또 春秋時代(춘추시대) 老子(노자)의 제자 文子(문자)가 쓴 ‘문자’에서 ’강가에 앉아 물고기를 탐하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 그물을 짜는 것만 못하다(臨河而羨魚 不如歸家結網/ 임하이선어 불여귀가결망)‘라고 표현했다. 어느 것이나 목적을 이루려면 헛된 욕심을 버리고 그만한 노력의 과정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유월비상ㅣ六月飛霜

유월비상ㅣ六月飛霜

유월비상ㅣ六月飛霜

○ 유월에 내리는 서리, 여자의 깊은 원한

○ 六(여섯 육) 月(달 월) 飛(날 비) 霜(서리 상)

억울(抑鬱)한 일을 당(當)한 사람이 있으면 오뉴월(五六月)의 더운 날씨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다. 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것이 있다. 여자의 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음력으로 5월이나 6월은 한여름인데 서리가 내린다고 했을까. 여자가 한 번 마음이 틀어져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으면 그만큼 매섭고 독하다는 비유의 말이다. 一婦含怨 五月飛霜(일부함원 오월비상)이란 말대로 오뉴월인 만큼 5월, 6월은 함께 쓴다.

이 말이 유래한 고사는 여럿이지만 먼저 ‘漢書(한서)’의 于定國(우정국)전의 내용을 보자. 後漢(후한)의 우정국이란 사람은 송사를 처리하는 것이 공정하기로 이름났다. 東海(동해)군의 태수로 갔을 때 그 지역은 3년 동안 큰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한 효부가 자식도 없이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개가도 않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했다. 누를 끼치기 싫었던 시어머니가 자결하자 시누이가 무고하여 효부는 관아에서 고문을 받고 사형 당했다. 진상을 파악한 우정국이 소를 잡아서 효부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우니 비로소 큰비가 내려 풍년이 들었다.

戰國時代(전국시대) 齊(제)나라 사람이었던 鄒衍(추연)은 燕(연)나라 惠王(혜왕)에게 중용되어 벼슬하면서 충성을 바쳤다. 그럼에도 혜왕은 주변에서 참소하는 말만 듣고 그를 옥에 가두었다. 추연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통곡하자 여름인데 하늘에서 서리가 내렸다(仰天而哭 盛夏天爲之降霜/ 앙천이곡 성하천위지강상)’. 중국 아동용 교재 ‘蒙求(몽구)’의 鄒衍降霜(추연강상) 이야기다. 元(원)나라 희곡작가 關漢卿(관한경)의 ‘竇娥寃(두아원)’에선 두아가 누명을 쓰고 망나니에 의해 목이 잘릴 때 유월 한여름인데도 눈이 내려 자신을 덮어줄 것이라 말한 것이 그대로 실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