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8일 화요일

적선여경ㅣ積善餘慶

적선여경ㅣ積善餘慶

적선여경ㅣ積善餘慶

○ 착한 일을 많이 행하면 경사가 따른다

○ 積(쌓을 적) 善(착할 선) 餘(남을 여) 慶(경사 경)

가훈으로도 적격인 이 성어는 積善之家 必有餘慶(적선지가 필유여경)의 준말이다. ‘易經(역경)’의 文言傳(문언전)에 실려 있다. 周(주)나라 때부터 내려왔다고 周易(주역)이라고도 하는 이 책은 三經(삼경)의 하나로 占卜(점복)을 위한 원전이라 일컫는다. 八卦(팔괘) 중에서 乾卦(건괘)와 坤卦(곤괘)의 해설을 담은 문언전의 부분을 옮겨보자. ‘선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고, 착하지 못한 일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다.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그 아비를 해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 유래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 漸矣/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 신시기군 자시기부 비일조일석지고 기소유내자 점의).’ 殃은 재앙 앙, 弑는 윗사람죽일 시.

금언과 명구를 모아 놓은 책 ‘明心寶鑑(명심보감)’에도 좋은 말이 빠질 수 없다. 姜太公(강태공)이 한 것으로 나오는 見善如渴(견선여갈), 莊子(장자)의 말이라며 一日不念善 諸惡皆自起(일일불념선 제악개자기/ 하루라도 착한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여러 악한 것이 모두 저절로 일어난다) 등이다. 洪自誠(홍자성)의 菜根譚(채근담)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선행이 더욱 값지다면서 ‘善之顯者功小 而隱者功大(선지현자공소 이은자공대)’라는 말도 남겼다.

망자재배ㅣ芒刺在背

망자재배ㅣ芒刺在背

망자재배ㅣ芒刺在背

○ 가시를 등에 지고 있다

○ 芒(가끄라기 망) 刺(가시 자) 在(있을 재) 背(등질 배)

가시를 등에 지고 있다는 뜻으로,마음이 조마조마하고 편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 등 뒤에 자기가 꺼리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것을 뜻한다

한나라 선제가 보위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선제가 고조의 묘를 알현하기 위해 출발할 때, 그의 호위를 담당한 자는 대장군 곽 광이었다. 곡 광은 일찍이 무제의 유조를 받들어 대사마대장군으로서 소제를 도왔으며, 그 다음 창읍왕이 음란한 행실을 계속하자 그를 폐위시켜 중기의 정치실력자 선제를 임금의 자리에 세웠던 인물이다.

곽 광의 권력이 하늘을 뚫을 정도였으므로 선제는 내심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곽 광과 함께 가는 것이 마치 가시를 등에 진 것과 같이 불편하였다. 이 당시 그의 표정은 마치 무엇엔가 위협을 받는 듯 불안해 하며 굳어 있었다. 그 후 거기장군 장안세가 곽 광을 대신하여 선제를 모신 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편안하고도 조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불효유삼ㅣ不孝有三

불효유삼ㅣ不孝有三

불효유삼ㅣ不孝有三

○ 부모에게 불효하는 일 세 가지

○ 不(아닐 불) 孝(효도 효) 有(있을 유) 三(석 삼)

부모(父母)에게 불효(不孝)하는 일에 세 가지가 있다는 뜻

첫째 부모(父母)에게 영합하여 불의(不義)에 빠지게 하는 일, 둘째 집이 가난하고 부모(父母)가 늙어도 벼슬하지 않는 일, 셋째 장가가지 않고 자식(子息)이 없어 선조(先祖)의 제사(祭祀)를 끊는 일의 세 가지라 하였다.

곤수유투ㅣ困獸猶鬪

곤수유투ㅣ困獸猶鬪

곤수유투ㅣ困獸猶鬪

○ 위급할 때는 약한 짐승이라도 싸우려고 덤빔

○ 困(곤할 곤) 獸(짐승 수) 猶(오히려 유) 鬪(싸울 투)

위급(危急)한 경우(境遇)에는 짐승일지라도 적을 향(向)해 싸우려 덤빈다는 뜻으로,곧 궁지(窮地)에 빠지면 약한 자가 도리어 강(强)한 자(者)를 해칠 수 있다는 뜻

위험한 상황에 부딪치면 잽싸게 달아나는 쥐는 ‘고양이 앞에 쥐’란 말대로 고양이 앞에선 더욱 약하다. 이런 약점을 잡고 고양이가 막다른 곳까지 쥐를 몰아넣으면 어떻게 될까. ‘궁지에 빠진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처럼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다. 窮鼠齧猫(궁서설묘, 齧은 깨물 설)란 성어대로 고양이가 당황하는 처지가 된다. 새도 막다른 곳까지 쫓기면 덤빈다는 鳥窮則啄(조궁즉탁)이나 심하게 괴롭히면 사로잡힌 새도 수레를 엎는다는 禽困覆車(금곤복거) 등 유사한 성어도 여럿이다.

아무리 약한 짐승이라도 곤경에 빠지면(困獸) 오히려 덤벼든다(猶鬪)는 이 말도 마찬가지 뜻이다.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에 나온다. 무지렁이 순박한 사람일수록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이판사판 저항하게 되는 것을 비유했다. 사지에 몰린 적을 벼랑까지 쫓으면 결사적인 반격을 받게 되므로 피해야 한다는 孫子兵法(손자병법)의 窮寇勿迫(궁구물박)도 같은 의미의 경계다.

宣公(선공) 12년조에 실린 내용을 간추려보자. 晉(진)나라 景公(경공, 재위 기원전 600~581)때 楚(초)와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진의 장수 荀林父(순림보)가 크게 패했다. 경공이 대로하여 순림보를 참형에 처하려 하자 대부 士貞子(사정자)가 나섰다. 이전 文公(문공)이 초나라에 대승을 거두고도 근심에 싸여 있었는데 그 이유를 묻자 적의 장수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며 말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곤경에 빠진 짐승일수록 더욱 힘껏 싸우는 법인데 하물며 재상이 살아 있으니 말할 나위 있겠는가(困獸猶鬪 況國相乎/ 곤수유투 황국상호)?’라고 문공이 말했다며 장수를 죽이는 것은 두 번 패하는 일이라고 간했다. 경공은 옳게 받아들이고 순림보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반부논어ㅣ半部論語

반부논어ㅣ半部論語

반부논어ㅣ半部論語

○ 반 권의 논어, 학습의 중요함

○ 半(반 반) 部(떼 부) 論(논할 논) 語(말씀 어)

반 권의 논어(論語)라는 뜻으로, 자신의 지식을 겸손하게 이르거나 학습의 중요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송(宋)나라 나대경(羅大經)이 쓴 《학림옥로(鶴林玉露)》에 나온다.

송(宋)나라의 태조 조광윤(趙光胤)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 가운데 조보(趙普)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전쟁터에 나가느라 글공부를 할 틈이 없어 학문에 어두웠으므로, 늘 이 점을 염려하여 퇴근한 뒤에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글을 읽어 마침내 많은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

태조가 죽고 태종이 즉위한 뒤에도 승상으로 임용되어 국정을 잘 살폈는데,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를 몰아내기 위해 "그는 겨우 《논어》밖에 읽지 못해서 중책을 맡기기 어렵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태종이 조보를 불러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臣)이 평생에 아는 바는 진실로 《논어》를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반 권의 지식으로 태조께서 천하를 평정하시는 것을 보필하였고, 지금은 그 나머지 반으로써 폐하께서 태평성대를 이룩하시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臣平生所知 誠不出此 昔以其半輔太祖定天下 今欲以其半輔陛下治太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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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조보가 죽은 뒤 가족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의 책 상자를 열어 보니, 정말 《논어》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반부논어는 위의 글에서 유래한 말로, 반부논어치천하(半部論語治天下)라고도 쓴다. 모름지기 학문을 하는 사람은 이렇듯 자신의 지식을 겸손해할 줄도 알아야 함을 이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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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타삼척ㅣ讓他三尺

양타삼척ㅣ讓他三尺

양타삼척ㅣ讓他三尺

○ 석 자의 땅을 양보하다, 양보의 미덕

○ 讓(사양할 양) 他(다를 타) 三(석 삼) 尺(자 척)

폭이 석자 되는 땅(三尺)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讓他)는 이 성어는 이웃과의 다툼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땅을 뒤로 물린 고사에서 나왔다. 손해를 감수한 양보의 미덕을 나타낼 때 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淸(청)나라 康熙帝(강희제)때 재상을 지낸 張英(장영, 1637~1708)이란 사람이다. 호가 樂圃(낙포)인 그는 고위직에 있으면서 공정한 일처리로 덕망이 높았고, 아들 張廷玉(장정옥, 1672~1755)도 뒤따라 老少二宰相(노소이재상)이란 명성을 얻었다. 또 6대에 13명의 진사가 배출됐다고 할 정도다. ‘桐城縣誌(동성현지)’에 실려 있다는 내용을 보자.

장영이 높은 자리에 있을 때 安徽省(안휘성) 桐城(동성)에 있는 그의 고향집에서 편지가 왔다. 좁은 공간을 사이에 둔 이웃집에서 담을 쌓으면서 밖으로 몇 자 나왔는데 막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장영이 답장을 보냈다. ‘단지 담장 때문에 천 리 밖으로 편지를 쓰다니, 석 자쯤 양보해도 탈이 없잖을까(千里修書只爲墻 讓他三尺有何妨/ 천리수서지위장 양타삼척유하방).’ 그러면서 만리장성은 남아 있지만 쌓은 秦始皇(진시황)은 볼 수가 없다고 했다. 편지를 읽은 고향 사람들은 자기 땅으로 석 자 들여 담을 쌓았고, 그것을 본 이웃집도 새 담을 허물고 석 자 뒤로 물려 폭이 여섯 자 되는 새 길이 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길을 여섯 자 골목이라고 六尺巷(육척항)이라 이름 붙였다.

파경ㅣ破鏡

파경ㅣ破鏡

파경ㅣ破鏡

○ 깨어진 거울, 이지러진 달

○ 破(깨뜨릴 파) 鏡(거울 경)

깨어진 거울, 이지러진 달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부부(夫婦)의 금실이 좋지 않아 이혼(離婚)하게 되는 일

당(唐)나라 맹계(孟棨)가 지은 《본사시(本事詩)》 〈정감(情感)> 편에 나오는 말이다. 남조(南朝)의 마지막 황태자 진(陳) 때에 시종 서덕언(徐德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자의 누이 낙창공주(樂昌公主)를 아내로 맞았고 두 사람은 매우 금슬이 좋았다. 정국이 악화되고 수(隋)나라가 쳐들어오려 하자 서덕언은 아내에게 말했다. "그대의 재주와 용모가 뛰어나니 나라를 빼앗기면 분명 적국에 끌려가 권세가에 보내질 것이고 우린 이대로 영영 헤어지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이내 거울을 쪼개 한쪽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반쪽을 아내에게 건네며 말했다. "훗날 정월 보름날이 되면 이걸 시장에 파시오.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이걸 가지고 당신을 찾아 갈 것이오.\ 이렇게 부부는 헤어졌고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아내는 과연 수나라 장군인 양소(楊素)의 집에 보내졌고 몹시 총애를 받았다. 서덕언은 이리저리 떠돌며 고생하다 겨우 장안에 이르렀고 마침 정월 보름날이 되어 시장을 찾아갔다. 시장을 서성거리다 어떤 이가 반쪽 거울을 팔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꼭 아내와 나눠 가졌던 그 거울 같았다. 자신이 갖고 있던 반쪽을 꺼내 맞춰 보니 아내에게 주었던 그 거울이 맞았다. 서덕언은 곧장 아내를 찾아가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흘리며 거울 뒷면에 시를 적어 돌려보냈다.

거울은 사람과 함께 갔는데, 거울만 돌아오고 사람은 아니 왔네. 항아의 그림자는 다시 없고, 달빛만 그저 머무는구나. (鏡與人俱去, 鏡歸人不歸. 無複嫦娥影, 空留明月輝.)

거울을 돌려받은 아내는 뒷면의 시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 사실을 안 양소는 부부의 이야기에 감동하여 서덕언에게 그 아내를 돌려주고 후히 대접하고 보내주었다.

파경은 본래 이 고사에서처럼 원래 남녀가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파경중원(破鏡重圓), 반경중원(半鏡重圓), 반경환원(半鏡還圓), 파경중합(破鏡重合), 경파(鏡破)라고도 한다. 후에는 남녀가 헤이지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었고, 이별할 때 나누어 가진 거울이 부인이 배반하자 까치로 변했다는 이야기의 경화작비(鏡化鵲飛)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매처학자ㅣ梅妻鶴子

매처학자ㅣ梅妻鶴子

매처학자ㅣ梅妻鶴子

○ 매화 아내에 학 아들

○ 梅(매화나무 매) 妻(아내 처) 鶴(학 학) 子(아들 자)

매화(梅花)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子息)으로 삼는다는 뜻으로,선비의 풍류(風流) 생활(生活)을 두고 이르는 말

송나라에 임포라는 자가 살았다. 임포는 평생 동안 장가도 들지 않고 고요한 가운데 고달픈 삶을 살아간 시인이다. 그는 영리를 구하지 않는 성격을 흠모하여 그의 시 또한 청고하면서 유정한 풍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시명으로 평가되는 것을 꺼려서 지은 시를 많이 버렸고 자신의 시가 후세에 전해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기록하지도 않았다.

임포는 서호 근처의 고산에서 은둔 생활을 했는데, 자주 호수에 조각배를 띄워 근처 절에 가서 노닐었으며, 동자는 학이 나는 것을 보고 객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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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포는 아내와 자식이 없는 대신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 수많은 매화나무를 심어 놓고 학을 기르며 즐겁게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포는 매화아내에 학 아들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이후로 후세 사람들은 매처학자라는 말로써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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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호보ㅣ鷹視虎步

응시호보ㅣ鷹視虎步

응시호보ㅣ鷹視虎步

○ 매의 눈빛과 범의 걸음걸이, 흉악한 사람의 외모

○ 鷹(매 응) 視(볼 시) 虎(범 호) 步(걸음 보)

처음 만났을 때 상대방이 용의 얼굴과 호랑이의 눈썹을 가진 龍顔虎眉(용안호미)로 느낀다면 엄숙함에 위압을 느낀다. 용처럼 날뛰고 범처럼 걷는다는 龍驤虎步(용양호보)의 인상을 주었다면 용맹스런 영웅의 모습을 연상한다. 그런데 상상의 용은 보지 못했으니 상상이겠고, 매와 같은 눈빛(鷹視)에 호랑이 같은 걸음걸이(虎步)라면 날카로운 매가 연상되니 흉악한 사람의 외모를 형용하는 말이 된다. 매 눈초리에 이리의 걸음 鷹視狼步(응시낭보)라 해도 같은 뜻이다.

春秋時代(춘추시대) 楚(초)나라의 간신 費無忌(비무기)의 모함으로 부친을 잃은 伍子胥(오자서)는 吳(오)나라 闔閭(합려)의 휘하로 망명했다. 얼마 뒤 같은 처지의 伯嚭(백비, 嚭는 클 비)도 귀순해 오자 오자서는 연회를 베풀고 환대했다. 연회에 참석하고 있던 被離(피리)라는 대부가 오자서에게 말했다. ‘백비는 눈길이 매와 같고 범과 같이 걸으니, 필시 살인을 저지를 나쁜 상(鷹視虎步 專功擅殺之性/ 응시호보 전공천살지성)’이라며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다. 擅은 멋대로할 천. 오자서는 백비와 같은 원한을 지녔기 때문이라며 충고를 듣지 않았다. 결국 越(월)나라와 내통한 백비에 의해 오자서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後漢(후한)의 趙曄(조엽)이 쓴 ‘吳越春秋(오월춘추)’에 나온다.

2025년 10월 27일 월요일

소상반죽ㅣ瀟湘斑竹

소상반죽ㅣ瀟湘斑竹

소상반죽ㅣ瀟湘斑竹

○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

○ 瀟(강이름 소) 湘(강이름 상) 斑(얼룩 반) 竹(대나무 죽)

소상반죽(瀟湘斑竹)이란 눈물자국 모양의 무늬가 박혀 있는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말한다. 중국 소상강 근처에서 자라는 대나무로 만든 것이라서 구하기가 힘든 젓가락을 말함.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을 돕기 위한 총지휘관으로 파견됐을 때 일이다.그는 처음 조선 땅에 들어와 영접관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조선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은 ‘천하제일미(天下第一味)’가 있어야 밥을 먹을 수 있고 ‘소상반죽(瀟湘斑竹)’이 있어야 반찬을 먹을 수 있다는 까다로운 요구를 했다.

조선의 영접관들이 천하제일미가 무엇인지 몰라 당황할 때 당시 관서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웃으면서 소금 한 그릇과 소상지방의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꺼내놓았다. 이여송은 크게 놀라며 조선에도 인물이 있음을 알고 그 후 태도를 달리 했다고 한다.이처럼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간이 안 맞으면 그 맛을 잃기에 소금을 천하제일미라 칭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