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9일 수요일

마부작침ㅣ磨斧作針

마부작침ㅣ磨斧作針

마부작침ㅣ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

○ 磨(갈 마) 斧(도끼 부) 作(지을(만들) 작) 針(바늘 침)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努力)하면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

남송(南宋) 때 축목(祝穆)이 지은 지리서 《방여승람(方與勝覽)》과 《당서(唐書)》 문예전(文藝傳)에 보이는 말이다. 당(唐)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불린 이백(李白)은 서역의 무역상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촉(蜀)에서 보냈다. 젊은 시절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이백은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려 쓰촨성泗川省 각지의 산을 떠돌기도 하였다.

이때 학문을 위해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갔던 이백이 공부에 싫증이 나 산에서 내려와 돌아오는 길에 한 노파가 냇가에서 바위에 도끼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백이 물었다. "할머니,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한단다. " 노파의 대답을 들은 이백이 기가 막혀서 "도끼로 바늘을 만든단 말씀입니까?" 하고 큰 소리로 웃자, 노파는 가만히 이백을 쳐다보며 꾸짖듯 말하였다.

"얘야, 비웃을 일이 아니다.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가 있단다." 이 말을 들은 이백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그 후로는 한눈 팔지 않고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그가 고금을 통하여 대시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러한 경험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철저이성침(磨鐵杵而成針), 마철저(磨鐵杵), 철저성침(鐵杵成針), 우공이산(愚公移山)이나 수적석천(水滴石穿)과 같은 의미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를 가지고 계속 노력하면 마침내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망국지음ㅣ亡國之音

망국지음ㅣ亡國之音

망국지음ㅣ亡國之音

○ 나라를 망치는 음악

○ 亡(망할 망) 國(나라 국) 之(갈 지) 音(소리 음)

나라를 망치는 음악(音樂)이란 뜻으로,'저속(低俗)하고 난잡(亂雜)한 음악(音樂)'을 일컫는 말

예기(禮記) 악기(樂記)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은 편하고 즐거우니 그 정치가 조화를 이루게 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음악은 원망하고 성내게 하니 그 정치를 어긋나게 한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은 슬프고 생각하게 하니 그 백성이 곤궁하니라.

또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춘추시대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 복수(濮水)라는 곳에서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들었다. 영공은 자기도 모르게 멈추어 서서 그 소리를 듣다가 수행 중인 악사 사연(師涓)에게 악보를 베껴두라고 일렀다. 이윽고 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진나라 평공(平公) 앞에서, 이 곳으로 오는 도중 들은 새로운 음악이라며 사연으로 하여금 그 곡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당시 진나라에는 사광(師曠)이라는 이름난 악사가 있었는데, 그가 음악을 연주하면 구름이 몰려들고 학이 춤을 춘다고 하였다.

사연의 음악을 듣던 사광은 황급히 사연의 손을 잡고 연주를 중단시키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새로운 음악이라는 것입니까? 이것은 망국지음입니다. 연주해서는 안 됩니다.” 깜짝놀란 영공과 평공이 그 사연을 묻자, 사광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옛날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사연(師延)이라는 악사가 있었는데, 왕에게 신성백리(新聲百里)라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운 음악을 지어 바쳤습니다. 주왕은 이 음악에 빠져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즐기다가 주(周) 무왕(武王)에게 주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연은 악기를 안고 복수에 빠져 죽었는데, 지금도 복수를 지날 때는 누구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음악을 망국의 음악이라 하며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광풍제월ㅣ光風霽月

광풍제월ㅣ光風霽月

광풍제월ㅣ光風霽月

○ 맑은 날의 바람과 개인 날의 달

○ 光(빛 광) 風(바람 풍) 霽(갤 재) 月(달 월)

맑은 날의 바람과 개인 날의 달처럼 사람의 심성이 맑고 깨끗하거나 그러한 사람을 비유한다.

주돈이는 북송(北宋)의 유명한 유학자로 옛 사람의 풍모가 있으며 올바른 정치를 했다. 송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평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돈이의 인품은 매우 고결하고 가슴속이 맑아서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개인 날의 달과 같구나." 또한 주자의 시중에도 이런 말이 보인다.

"

파란 구름 흰 돌과 같은 맛인데 밝은 달 맑은 바람이 달리 전해 오는구나 광풍제월이란 성어는 마음이 넓어 자질구레한 데 거리끼지 아니하고 쾌활하며 쇄락(灑落)한 인품을 비유하는 말이다.

"

마각노출ㅣ馬脚露出

마각노출ㅣ馬脚露出

마각노출ㅣ馬脚露出

○ 간사하게 숨기고 있던 일을 드러내다

○ 馬(말 마) 脚(틈 각) 露(드래낼 노) 出(날 출)

말의 다리가 드러난다는 뜻으로,숨기려던 정체(正體)가 드러남을 이르는 말

"

馬脚의 각은 (脚:틈각)은 틈새라는 뜻이므로, 마각의 뜻은 숨기고 있는 틈(틈새)을 뜻하며 마각을 드러내다(마각노출)는 간사하게 숨기고 있던 일을 드러내다 란 뜻이다.

",

다시 말해 말의 다리와 말굽 사이에 난 긴 털이 말굽(틈)을 숨기고 있다가 부지중에 허옇게 드러낸다는 이유로 이 말이 생긴 것 같다. 마각이란 말은 후한서 반초전, 南史 조경종전, 왕건전시랑귀진시 등에 나와 있고, 남사 종경종전에서 나온 것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뜻이다.

눈높이

눈높이

눈높이

길을 걷다

노랗게 핀 민들레에 발을 멈춘다

참으로 앙증맞게 예쁘게도 피었다

키 작은 민들레와 입 맞추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쪼그리고 앉았다

낮은 민들레와 입 맞추기 위해서는

이만큼 내가 낮아져야 하는 것이었구나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지

땅이 이렇게 넓고 발아래 있다는 걸

잊고 살았다

땅의 숨결을 느끼려면 발 아래 엎드려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

낮아지기 위해선 나를 낮춰야만 하는

것이다

진정한 눈높이란

나를 버리고 너로 채우는 것

너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내가

한 발 더 가까이 너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

-민들레에게서 낮아지는 법을 배운 하루 / 청향 임소형-

"

각자위정ㅣ各自爲政

각자위정ㅣ各自爲政

각자위정ㅣ各自爲政

○ 사람이 각자 자기 멋대로 행동하면 결과가 뻔하다

○ 各(각각 각) 自(스스로 자) 爲(할 위) 政(정사 정)

사람이 각자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전체와의 조화나 협력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뻔함

춘추 시대의 일이다. 송(宋)나라가 진(晉)나라와 서로 협력하였기 때문에 송나라와 초(楚)나라는 사이가 벌어졌다. 이에 초나라 장왕(莊王)은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동맹국인 정(鄭)나라에 명하여 송나라를 치게 했다.

결전 전야에 송나라의 대장 화원(華元)은 장졸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특별히 양고기를 지급했다. 장졸들은 모두 크게 기뻐했지만, 화원의 마차부 양짐(羊斟)만은 이 양고기를 먹지 못했다.

어떤 부장(副將)이 그 이유를 묻자 화원은 이렇게 대답했다."마차부 따위를 먹일 필요는 없다. 마차부는 전쟁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내가 한 일에 아무 참견 말게.“

이튿날 양군의 접전이 시작되었다. 화원은 양짐이 모는 마차 위에서 지휘를 했다. 송나라와 정 나라의 군사가 모두 잘 싸워 쉽게 승패가 나지 않아 화원이 양짐에게 명령했다. "마차를 적의 병력이 허술한 오른쪽으로 돌려라.” 그러나 양짐은 반대로 정나라 군사가 밀집해 있는 왼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당황한 화원이 소리쳤다."아니,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 "어제의 양고기는 당신의 뜻이며, 오늘의 이 일은 나의 생각이오."

양짐이 이렇게 말하며 곧바로 정 나라 군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마차를 몰았기 때문에 화원은 마침내 붙잡히고 말았다. 대장이 포로가 된 것을 본 송나라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 결과 250여 명의 군사가 적군에게 사로잡히고 사공(司空)까지 포로가 되었다. 정 나라 군사는 도합 460량의 병거(兵車)를 포획 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송나라의 대패는 바로 양짐이 화원의 지휘에 따르지 않고 "各自爲政"했기 때문이다.

슬견외경ㅣ蝨犬畏敬

슬견외경ㅣ蝨犬畏敬

슬견외경ㅣ蝨犬畏敬

○ 이나 개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다.

○ 蝨(이 슬) 犬(개 견) 畏(두려워할 외) 敬(공경 경)

고려시대 문호 李奎報(이규보)의 ‘東國李相國集(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수필 ‘虱犬說(슬견설, 虱은 蝨과 같은 이 슬)’에 나온다. 고전번역원의 한역을 토대로 간단히 추려보면 이렇다. 한 사람이 찾아와 길거리서 개를 잡는 모습을 보았다며 그 모습이 참혹하여 앞으로는 개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白雲居士(백운거사, 이규보 아호)가 답하길 화로를 끼고 이를 잡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 자기는 다시 이를 잡지 않겠다고 했다. 그 사람이 미물과 큰 동물을 동일시하여 말하니 놀리는 것이라고 화를 냈다. 그래서 타이른다. ‘무릇 혈기가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곤충 개미에 이르기까지 삶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은 동일한 것이네’ 그러면서 물러나서 달팽이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큰 붕새처럼 같이 보게 되면 도를 논의하자고 말했다.

만물은 크기나 겉모습, 인간에 대한 이로움과 해로움과는 상관없이 모두 근원적으로 동일한 존재라고 인식한 사상은 菜根譚(채근담)의 ‘쥐를 위해 항상 밥을 남겨두고, 나방을 위해 등불을 켜지 않는다고 한 말과 통한다.

흉중생진ㅣ胸中生塵

흉중생진ㅣ胸中生塵

흉중생진ㅣ胸中生塵

○ 가슴에 먼지가 생긴다

○ 胸(가슴 흉) 中(가운데 중) 生(날 생) 塵(티끌 진)

가슴에 먼지가 생긴다는 뜻으로, 사람을 잊지 않고 생각은 오래 하면서 만나지 못함을 일컫는 말, 마음속에 고통∙비애 따위의 감정이 일어남을 이르는 말. ② 오랫동안 남을 그리워하면서 만나지 못하고 있음.

주희(朱熹)편에 이런 글귀가 있다.

十年不共賦陽春(십년불공부양춘)

正有胸中萬斛塵(정유흉중만곡진)

10년 동안 봄을 읊기 함께 하지 못하여,

가슴속에는 만 섬 티끌 바로 쌓였구나.

구이지학ㅣ口耳之學

구이지학ㅣ口耳之學

구이지학ㅣ口耳之學

○ 들은 것을 새기지 않고 남에게 전하기만 한다

○ 口(입 구) 耳(귀 이) 之(어조사 지) 學(배울 학)

들은 것을 새기지 않고 그대로 남에게 전하기만 한다. 조금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학문

군자의 학문은 귀에 들어가면 그대로 마음에 말하고, 신체에 정착하여 인격을 높이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사소한 말이나 동작도 많은 사람이 거울이 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면 곧바로 입으로 나온다. 즉 들은 대로 즉시 타인에게 전하고, 조금도 자신을 수양하는 양식으로 두지 않는다. 귀와 입 사이는 겨우 네 치, 그 네 치 사이만 신체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口耳之學"이라고 한다. 이래서는 대장부의 마음과 행동을 훌륭하게 할 수가 없다.

"

性惡說(성악설)을 주창한 荀子(순자)는 자신의 몸을 갈고 닦아 덕을 쌓기 위해 배웠던 학문이 변질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배움을 오로지 남을 가르쳐 먹고 살기 위한 생활의 방편으로만 쓴다는 것이었다. 勸學篇(권학편)에서 말한 내용을 보자.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 입으로 나온다. 입과 귀 사이는 네 치밖에 안 되는데, 어찌 일곱 자의 몸을 아름답게 하기에 족하겠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 口耳之間 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之軀哉/ 소인지학야 입호이 출호구 구이지간 즉사촌이 갈족이미칠척지구재). 軀는 몸 구. 즉 순자는 들은 것이나 배운 것을 깊이 새겨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겨를도 없이 즉시 남에게 그대로 전달해 자신의 학문과 지식을 자랑하는 것을 꼬집었다.

",

"

비슷한 뜻으로 남긴 孔子(공자)의 길에서 들은 것을 길에서 그대로 옮기는 것은 덕을 버리는 짓이다(道聽塗說 德之棄也/ 도청도설 덕지기야)라는 말이나 孟子(맹자)의 사람의 병폐는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데 있다(人之患 在好爲人師/ 인지환 재호위인사)고 남 앞에서 아는 체하기를 좋아하는 소인을 꼬집었다. 옛글을 외우고 다음 질문만 기다리는 記問之學(기문지학)이나 외워서 읊기만 하는 記誦之學(기송지학)도 옳은 학문의 태도가 아님은 물론이다.

"

송양지인ㅣ宋襄之仁

송양지인ㅣ宋襄之仁

송양지인ㅣ宋襄之仁

○ 송나라 양공의 인정

○ 宋(송나라 송) 襄(도울 양) 之(갈 지) 仁(어질 인)

송(宋)나라 양공(襄公)의 어짊」이라는 뜻으로,쓸데없이 베푸는 인정(人情)을 이르는 말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자부(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자부가 위(位)에 올라 양공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

그로부터 7년 후(B.C.643), 춘추의 첫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죽고, 송나라에는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가 될 징조라며 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간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소(昭:孝公)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 제, 초(楚) 세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걱정했다.

",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通交)한 정(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하남성 내)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전군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목이가 참다못해 진언했다."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열세(劣勢)한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하는 바람에 결국 이듬해 죽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