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9일 수요일

기쁨의 기술

기쁨의 기술

기쁨의 기술

옛날도 좋았는데 지금은 더 좋구나\xa0

지금도 좋지만 내일은 더 좋을거야\xa0

겨울도 좋았지만\xa0

봄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xa0

여름은 시원한 바다가 있고\xa0

가을은 단풍든 산이 있구나\xa0

비오는 날은 촉촉 해서 좋고\xa0

갠 날은 맑아서 좋구나\xa0

아이 때는 순수 해서 좋고\xa0

어른이 되면 지혜로워서 좋지\xa0

갈 때는 새로운 것을 보고\xa0

올 때는 그리운 것을 만나서 좋구나\xa0

아픔이 지나가면 기쁨이 오고\xa0

기쁨이 모이면 아픔도 이길거야\xa0

-정용철의 꽃처럼 불처럼 중에서-

망양보뢰ㅣ亡羊補牢

망양보뢰ㅣ亡羊補牢

망양보뢰ㅣ亡羊補牢

○ 양을 잃고서 그 우리를 고친다

○ 亡(달아날 망) 羊(양 양) 補(도울 보) 牢(우리 뢰)

양 잃고 우리를 고친다는 뜻으로, 이미 일을 그르친 뒤에는 뉘우쳐도 소용이 없음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 중국 전한(前漢) 때의 학자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초책(楚策)〉에서 유래되었다. 망우보뢰(亡牛補牢)도 같은 뜻이다.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에 장신(莊辛)이라는 대신이 있었다. 하루는 초 양왕(襄王)에게 사치하고 음탕하여 국고를 낭비하는 신하들을 멀리하고, 왕 또한 사치한 생활을 그만두고 국사에 전념할 것을 충언하였다. 그러나 왕은 오히려 욕설을 퍼붓고 장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장신은 결국 조(趙)나라로 갔는데, 5개월 뒤 진나라가 초나라를 침공하여 양왕은 성양으로 망명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양왕은 그제서야 비로소 장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고 조나라에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들였다. 양왕이 이제 어찌해야 하는지를 묻자 장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토끼를 보고 나서 사냥개를 불러도 늦지 않고, 양이 달아난 뒤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見兎而顧犬 未爲晩也 亡羊而補牢 未爲遲也)\고 하였습니다. 옛날 탕왕과 무왕은 백 리 땅에서 나라를 일으켰고, 걸왕과 주왕은 천하가 너무 넓어 끝내 멸망했습니다. 이제 초나라가 비록 작지만 긴 것을 잘라 짧은 것을 기우면 수천 리나 되니, 탕왕과 무왕의 백 리 땅과 견줄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망양보뢰는 이미 양을 잃은 뒤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는 뜻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실패 또는 실수를 해도 빨리 뉘우치고 수습하면 늦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뜻보다는 긍정적인 뜻이 강하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원래의 뜻과 달리, 일을 그르친 뒤에는 뉘우쳐도 이미 소용이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도 전자보다는 후자의 뜻으로 쓰인다. 망우보뢰(亡牛補牢: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와 같은 뜻이며,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사후청심환(死後淸心丸)·실마치구(失馬治廐)·실우치구(失牛治廐)·만시지탄(晩時之歎)과도 뜻이 통한다.

망진막급ㅣ望塵莫及

망진막급ㅣ望塵莫及

망진막급ㅣ望塵莫及

○ 먼지를 바라보고 미치지 못한다

○ 望(바랄 망) 塵(티끌 진) 莫(말 막) 及(미칠 급)

먼지를 바라보고 미치지 못한다는 말로, 원하는 바를 손에 넣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

당나라 때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남북조시대 남조인 남송(南宋)·제(齊)·양(梁)·진(陳) 등 4조(朝)의 역사를 다룬 《남사(南史)》에 보이는 내용이다.

남송의 복양(濮陽)에 오경지(吳慶之)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학문이 깊고 인격이 고매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왕의공(王義恭)은 양주(揚州) 태수로 부임하면서 그의 명성을 듣자 그에게 자기의 일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오경지는 태수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 기뻐 서슴없이 그 요청을 수락하였다. 그런데 후일 왕의공이 업무상의 과실로 인해 중앙 정부로부터 탄핵을 받고 처형되자, 오경지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을 보좌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오경지는 관직을 떠나 초야에 묻히려 하였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는 오흥(吳興) 태수로 임명된 왕곤(王棍)이라는 사람이 부임하면서 오경지를 불러 공조(工曺)의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왕곤을 만난 오경지는 “저는 나라의 일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지난번 왕의공 태수가 저를 지나치게 평가하여 나름대로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해 놓은 일이 없습니다. 이런 제게 관직을 다시 맡아달라고 하는 것은 물고기를 나무 위에서 기르고 새를 물 속에서 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고는 인사도 없이 황망히 그 자리를 떠났다. 왕곤이 급히 일어나 뒤를 따랐지만, 길에는 흙먼지만 보일 뿐 오경지는 간 곳이 없었다.

망진막급은 이와 같이 사람을 쫓아가다 미치지 못한 것을 가리켰는데, 오늘날에는 간절히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을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공경대부ㅣ公卿大夫

공경대부ㅣ公卿大夫

공경대부ㅣ公卿大夫

○ 삼공과 구경과 대부, 곧 벼슬이 높은 사람들

○ 公(공평할 공) 卿(벼슬 경) 大(클 대) 夫(지아비 부)

삼공과 구경 등 벼슬이 높은 사람들, 공(公)과 경(卿), 대부(大夫)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높은 벼슬에 있는 관인(官人)을 일컫는다.

공(公)과 경(卿), 대부(大夫)는 모두 중국 주(周) 시대의 관제(官制)에서 비롯된 말이다. 주(周)는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의 최고위 관직(官職)을 두고, 이를 삼공(三公)이라 하였다. 그리고 소사(少師), 소부(少傅), 소보(少保), 총재(冢宰), 사도(司徒), 종백(宗伯), 사마(司馬), 사구(司寇), 사공(司空) 등을 구경(九卿)이라 하였다.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합해 공경(公卿)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모두 국가의 대신(大臣)을 뜻했다. 대부(大夫)는 경(卿)과 사(士) 사이에 위치한 귀족(貴族) 신분을 가리켰는데, 주(周) 왕실에서 분봉된 각 국(國)마다 제후들은 대부(大夫)와 다시 봉건 관계를 맺었다.

주(周) 시대에 나타난 이러한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대부(大夫)의 관제(官制)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시대마다 관직의 명칭은 바뀌었지만 이들 나라들에서는 근대 이전까지 최고위 대신(大臣)을 삼공(三公), 구경(九卿)이라 불렀다. 그리고 4~5품 이상의 문산관(文散官)의 관품(官品)에 대부(大夫)라는 칭호를 붙였다. 조선 시대에는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의 삼정승(三政丞)을 삼공(三公)이라고 불렀으며, 육조(六曹)의 판서(判書)와 의정부(議政府)의 좌찬성(左贊成), 우찬성(右贊成) 그리고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을 구경(九卿)이라 불렀다. 그리고 정1품부터 종4품까지 문산관(文散官)의 관품(官品)에 대부(大夫)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마부작침ㅣ磨斧作針

마부작침ㅣ磨斧作針

마부작침ㅣ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

○ 磨(갈 마) 斧(도끼 부) 作(지을(만들) 작) 針(바늘 침)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努力)하면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

남송(南宋) 때 축목(祝穆)이 지은 지리서 《방여승람(方與勝覽)》과 《당서(唐書)》 문예전(文藝傳)에 보이는 말이다. 당(唐)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불린 이백(李白)은 서역의 무역상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촉(蜀)에서 보냈다. 젊은 시절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이백은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려 쓰촨성泗川省 각지의 산을 떠돌기도 하였다.

이때 학문을 위해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갔던 이백이 공부에 싫증이 나 산에서 내려와 돌아오는 길에 한 노파가 냇가에서 바위에 도끼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백이 물었다. "할머니,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한단다. " 노파의 대답을 들은 이백이 기가 막혀서 "도끼로 바늘을 만든단 말씀입니까?" 하고 큰 소리로 웃자, 노파는 가만히 이백을 쳐다보며 꾸짖듯 말하였다.

"얘야, 비웃을 일이 아니다.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가 있단다." 이 말을 들은 이백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그 후로는 한눈 팔지 않고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그가 고금을 통하여 대시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러한 경험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철저이성침(磨鐵杵而成針), 마철저(磨鐵杵), 철저성침(鐵杵成針), 우공이산(愚公移山)이나 수적석천(水滴石穿)과 같은 의미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를 가지고 계속 노력하면 마침내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망국지음ㅣ亡國之音

망국지음ㅣ亡國之音

망국지음ㅣ亡國之音

○ 나라를 망치는 음악

○ 亡(망할 망) 國(나라 국) 之(갈 지) 音(소리 음)

나라를 망치는 음악(音樂)이란 뜻으로,'저속(低俗)하고 난잡(亂雜)한 음악(音樂)'을 일컫는 말

예기(禮記) 악기(樂記)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은 편하고 즐거우니 그 정치가 조화를 이루게 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음악은 원망하고 성내게 하니 그 정치를 어긋나게 한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은 슬프고 생각하게 하니 그 백성이 곤궁하니라.

또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춘추시대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 복수(濮水)라는 곳에서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들었다. 영공은 자기도 모르게 멈추어 서서 그 소리를 듣다가 수행 중인 악사 사연(師涓)에게 악보를 베껴두라고 일렀다. 이윽고 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진나라 평공(平公) 앞에서, 이 곳으로 오는 도중 들은 새로운 음악이라며 사연으로 하여금 그 곡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당시 진나라에는 사광(師曠)이라는 이름난 악사가 있었는데, 그가 음악을 연주하면 구름이 몰려들고 학이 춤을 춘다고 하였다.

사연의 음악을 듣던 사광은 황급히 사연의 손을 잡고 연주를 중단시키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새로운 음악이라는 것입니까? 이것은 망국지음입니다. 연주해서는 안 됩니다.” 깜짝놀란 영공과 평공이 그 사연을 묻자, 사광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옛날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사연(師延)이라는 악사가 있었는데, 왕에게 신성백리(新聲百里)라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운 음악을 지어 바쳤습니다. 주왕은 이 음악에 빠져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즐기다가 주(周) 무왕(武王)에게 주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연은 악기를 안고 복수에 빠져 죽었는데, 지금도 복수를 지날 때는 누구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음악을 망국의 음악이라 하며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광풍제월ㅣ光風霽月

광풍제월ㅣ光風霽月

광풍제월ㅣ光風霽月

○ 맑은 날의 바람과 개인 날의 달

○ 光(빛 광) 風(바람 풍) 霽(갤 재) 月(달 월)

맑은 날의 바람과 개인 날의 달처럼 사람의 심성이 맑고 깨끗하거나 그러한 사람을 비유한다.

주돈이는 북송(北宋)의 유명한 유학자로 옛 사람의 풍모가 있으며 올바른 정치를 했다. 송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평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돈이의 인품은 매우 고결하고 가슴속이 맑아서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개인 날의 달과 같구나." 또한 주자의 시중에도 이런 말이 보인다.

"

파란 구름 흰 돌과 같은 맛인데 밝은 달 맑은 바람이 달리 전해 오는구나 광풍제월이란 성어는 마음이 넓어 자질구레한 데 거리끼지 아니하고 쾌활하며 쇄락(灑落)한 인품을 비유하는 말이다.

"

마각노출ㅣ馬脚露出

마각노출ㅣ馬脚露出

마각노출ㅣ馬脚露出

○ 간사하게 숨기고 있던 일을 드러내다

○ 馬(말 마) 脚(틈 각) 露(드래낼 노) 出(날 출)

말의 다리가 드러난다는 뜻으로,숨기려던 정체(正體)가 드러남을 이르는 말

"

馬脚의 각은 (脚:틈각)은 틈새라는 뜻이므로, 마각의 뜻은 숨기고 있는 틈(틈새)을 뜻하며 마각을 드러내다(마각노출)는 간사하게 숨기고 있던 일을 드러내다 란 뜻이다.

",

다시 말해 말의 다리와 말굽 사이에 난 긴 털이 말굽(틈)을 숨기고 있다가 부지중에 허옇게 드러낸다는 이유로 이 말이 생긴 것 같다. 마각이란 말은 후한서 반초전, 南史 조경종전, 왕건전시랑귀진시 등에 나와 있고, 남사 종경종전에서 나온 것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뜻이다.

눈높이

눈높이

눈높이

길을 걷다

노랗게 핀 민들레에 발을 멈춘다

참으로 앙증맞게 예쁘게도 피었다

키 작은 민들레와 입 맞추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쪼그리고 앉았다

낮은 민들레와 입 맞추기 위해서는

이만큼 내가 낮아져야 하는 것이었구나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지

땅이 이렇게 넓고 발아래 있다는 걸

잊고 살았다

땅의 숨결을 느끼려면 발 아래 엎드려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

낮아지기 위해선 나를 낮춰야만 하는

것이다

진정한 눈높이란

나를 버리고 너로 채우는 것

너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내가

한 발 더 가까이 너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

-민들레에게서 낮아지는 법을 배운 하루 / 청향 임소형-

"

각자위정ㅣ各自爲政

각자위정ㅣ各自爲政

각자위정ㅣ各自爲政

○ 사람이 각자 자기 멋대로 행동하면 결과가 뻔하다

○ 各(각각 각) 自(스스로 자) 爲(할 위) 政(정사 정)

사람이 각자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전체와의 조화나 협력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뻔함

춘추 시대의 일이다. 송(宋)나라가 진(晉)나라와 서로 협력하였기 때문에 송나라와 초(楚)나라는 사이가 벌어졌다. 이에 초나라 장왕(莊王)은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동맹국인 정(鄭)나라에 명하여 송나라를 치게 했다.

결전 전야에 송나라의 대장 화원(華元)은 장졸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특별히 양고기를 지급했다. 장졸들은 모두 크게 기뻐했지만, 화원의 마차부 양짐(羊斟)만은 이 양고기를 먹지 못했다.

어떤 부장(副將)이 그 이유를 묻자 화원은 이렇게 대답했다."마차부 따위를 먹일 필요는 없다. 마차부는 전쟁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내가 한 일에 아무 참견 말게.“

이튿날 양군의 접전이 시작되었다. 화원은 양짐이 모는 마차 위에서 지휘를 했다. 송나라와 정 나라의 군사가 모두 잘 싸워 쉽게 승패가 나지 않아 화원이 양짐에게 명령했다. "마차를 적의 병력이 허술한 오른쪽으로 돌려라.” 그러나 양짐은 반대로 정나라 군사가 밀집해 있는 왼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당황한 화원이 소리쳤다."아니,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 "어제의 양고기는 당신의 뜻이며, 오늘의 이 일은 나의 생각이오."

양짐이 이렇게 말하며 곧바로 정 나라 군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마차를 몰았기 때문에 화원은 마침내 붙잡히고 말았다. 대장이 포로가 된 것을 본 송나라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 결과 250여 명의 군사가 적군에게 사로잡히고 사공(司空)까지 포로가 되었다. 정 나라 군사는 도합 460량의 병거(兵車)를 포획 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송나라의 대패는 바로 양짐이 화원의 지휘에 따르지 않고 "各自爲政"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