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일 토요일

득어망전ㅣ得魚忘筌

득어망전ㅣ得魚忘筌

득어망전ㅣ得魚忘筌

○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린다

○ 得(얻을 득) 魚(고기 어) 忘(잊을 망) 筌(가리(고기 잡는 기구) 전)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린다. 목적을 이루면 그 때까지 수단으로 삼았던 사물은 무용지물이 됨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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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에 나오는 말이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고 만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는 도구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는 잊어버리고 만다. 이처럼 말이란 마음속에 가진 뜻을 상대편에게 전달하는 수단이므로 뜻을 얻으면 말은 잊어버리고 만다. 뜻을 얻고 말을 잊어버린 사람과 말하고 싶구나(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吾安得夫忘言之人 而與之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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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 망전(忘筌)이나 망제(忘蹄), 망언(忘言)은 모두 시비(是非), 선악(善惡)을 초월한 절대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득어망전이란, 진리에 도달하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한 모든 수단을 버린다는 의미이다. 불경의 하나인 《사유경(蛇喩經)》에 보면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온다.

"비구들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뗏목의 비유를 들겠다. 어떤 나그네가 긴 여행 끝에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는 생각하기를 바다 저쪽은 평화로운 땅이니 그리 가야겠다 하고 뗏목을 만들어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 바다를 무사히 건넌 이 나그네는 그 뗏목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것이 아니었으면 바다를 건너지 못했을 것이므로 은혜를 생각해 메고 가야겠느냐? 아니면, \이 뗏목 때문에 나는 바다를 무사히 건넜다.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이용하도록 여기에 두고 나는 내 갈길을 가자\ 하겠느냐. 이 나그네는 뗏목을 두고 가도 그의 할 일을 다한 것이 된다. 너희들도 이 나그네가 뗏목을 잊은 것처럼 궁극에는 교법마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장자》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절대 경지에 들어서면 수단은 물론이거니와 절대 경지에 들어섰다는 것마저 잊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득어망전이란, 자기의 뜻한 바를 이룬 후에는 그 수단이나 과정에 대하여는 애착을 갖지 말라는 것인데, 오늘날에는 토사구팽(兎死狗烹)처럼 배은망덕한다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거어지탄ㅣ車魚之歎

거어지탄ㅣ車魚之歎

거어지탄ㅣ車魚之歎

○ 수레와 고기가 없음을 탄식함

○ 車(수레 거) 魚(고기 어) 之(어조사 지) 歎(탄식할 탄)

수레와 고기가 없음을 탄식한다는 뜻으로 사람의 욕심에는 한이 없음을 말합니다.

중국 전국시대 제 나라 맹상군의 식객 중에 풍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별 하는 일도 없이 늘 대접 잘 안 해 준다고 투덜거렸답니다.

처음엔 상에 고기가 없다고 노래하고, 행사(幸舍)로 옮겨 생선이 밥상에 나오게 된 뒤에는, 또 출입할 때 타고 다닐 수레가 없다고 탄식한 고사입니다. 맹상군이 그 청을 다 들어 주었는데, 결국 풍환이 맹상군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무신불립ㅣ無信不立

무신불립ㅣ無信不立

무신불립ㅣ無信不立

○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

○ 無(없을 무) 信(믿을 신) 不(아닐 불) 立(설 립)

믿음이 없으면 일어설 수 없다는 뜻으로,정치(政治)나 개인(個人)의 관계(關係)에서 믿음과 의리(義理)의 중요성(中要性)을 강조(强調)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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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자공(子貢)이 정치(政治)에 관해 묻자, 공자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라고 대답하였다. 자공이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며, “예로부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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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지(三國志)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북해(北海) 태수를 지낸 공융(孔融:153∼208)은 조조(曹操:155∼220)의 공격을 받은 서주(徐州) 자사 도겸(陶謙)을 구하기 위해 유비(劉備:161∼223)에게 공손찬(公孫瓚:?∼199)의 군사를 빌려서 도겸을 도와주게 하였다. 공융은 군사를 가지면 유비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비에게 신의를 잃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BC 552∼BC 479)의 말에 따라 "성인은 \예부터 내려오면서 누구든지 죽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하였습니다. 저는 군대를 빌릴지라도 이곳으로 꼭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무신불립(無信不立)’은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우므로 신의를 지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군계일학ㅣ群鷄一鶴

군계일학ㅣ群鷄一鶴

군계일학ㅣ群鷄一鶴

○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

○ 鷄(닭 계) 群(무리 군) 一(한 일) 鶴(학 학)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이란 뜻으로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한 사람이 섞여 있음

위진(魏晉)시대,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瑞康) 산도(山濤) 왕융(王戎) 유령(劉伶) 상수(尙秀) 곧 죽림 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가 있었다. 이들은 종종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노장(老莊)의 허무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청담(淸談)을 즐겨 담론했다.

그런데 죽림 칠현 중 위나라 때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있던 혜강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 당했다.

그 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 되는 아들 혜소( 紹:?∼304)가 있었다. 혜소가 성장하자 중신(重臣) 산도가 그를 무제武帝:256∼290,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에게 천거했다."폐하,《서경(書經)》의 〈강고편(康誥篇)〉에는 부자간의 죄는 서로 연좌(連坐)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나이다.

혜소가 비록 혜강의 자식이긴 하오나 총명함이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극결( 缺)에게 결코 뒤지지 않사오니 그를 비서랑(비書郞)으로 기용하시오소서." "경(卿)이 천거(薦擧)하는 사람이라면 승(丞)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 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혜소가 입궐하던 그 이튿날, 어떤 사람이 자못 감격하여 와융에게 말했다."어제 구름처럼 많이 모인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입궐하는 혜소를 보았습니다만, 그 늠름한 모습은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우뚝 선 한 마리의 학鷄群一鶴\같았습니다."그러자 왕융은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그는 혜소보다 훨씬 더 늠름했다네."

막고야산ㅣ莫姑野山

막고야산ㅣ莫姑野山

막고야산ㅣ莫姑野山

○ 신선들이 사는 곳

○ 莫말 막 姑시어머니 고 野들 야 山뫼 산

일설로는 "莫"이 "邈"과 같은 자로서 \멀다\는 뜻이 있다고 하여, \먼 고야산\이라고도 한다. 고야산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선들이 사는 선경으로 전해오고 있다. 또 \막고야산\이라고 하여 북해 속에 신선이 사는 산을 뜻하기도 한다.

도를 터득한 현인 견오가 연숙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접여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네만, 글쎄 그게 너무 터무니없고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았지 돌아올 줄을 모르더군. 나는 그 이야기가 은하수처럼 한없이 계속되는 것 같아 그만 오싹해졌네. 너무도 차이가 있어 상식에 어긋나네."

연숙이 물었다. "그 이야기란 어떤 건가?" 견오가 대답했다. "막고야산에 신인이 살고 있지. 그 피부는 얼음이나 눈처럼 희고, 몸매는 처녀같이 부드러우며 곡식은 먹지 않고 바람과 이슬을 마시며 구름을 타고 용을 몰아 천지 밖에서 노닌다네. 그가 정신을 한데로 집둥하면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병들지 않고 곡식도 잘 익는다는 거야. 이야기가 하도 허황돼서 믿어지지가 않네."

연숙이 말했다. "그렇군. 장님에게는 색깔의 아름다움이 안 보이고 귀머거리에겐 음악의 황홀한 가락이 안 들리지만,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육체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닐세. 지식에도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네. 그게 바로 지금의 자네를 말하네. 신인의 덕은 만물을 섞어 하나로 만들려는 거지. 세상 사람들은 그를 위해 애써 수고하여 하겠나.

이러한 신인은 외계의 사물에 의해 피해를 입는 일이 없고 홍수가 나서 하늘에 닿을 지경이 돼도 빠지는 일이 없으며, 큰 가뭄으로 금속과 암석이 녹아 흘러 대지나 산자락이 타도 뜨거운 줄 모르네. 신인은 그 몸의 먼지나 때, 쭉정이와 겨로도 세상 사람들이 성인이라는 요나 순을 만들 수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천하 따위를 위해 수고하려 하겠는가."

망운지정ㅣ望雲之情

망운지정ㅣ望雲之情

망운지정ㅣ望雲之情

○ 자식이 객지에서 부모를 그리는 정

○ 望(바라볼 망) 雲(구름 운) 之(어조사 지) 情(뜻 정)

구름을 바라보며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①타향(他鄕)에서 고향(故鄕)에 계신 부모(父母)를 생각함 ②멀리 떠나온 자식(子息)이 어버이를 사모(思慕)하여 그리는 정

당서(唐書)에 보이는 내용이다. 당(唐)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은 고종(高宗) 때 대리승(大理丞)이 되어 1년 동안 1만 7000명을 올바르게 재판하였다. 그뒤 강남순무사(江南巡撫使)가 되어서는 음란하거나 민심을 미혹하는 사당 1,700개소를 없애고 예주자사(豫州刺使)로 있을 때에는 무고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 2,000명을 구제해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후일 내준신(來俊臣)의 모함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가 병주(幷州)의 법조참군(法曹參軍)으로 임명되어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때 그의 부모는 하양(河陽)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적인걸이 타이항산太行山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니 한 조각 흰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옆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저 구름 아래 살고 계시겠지." 그리고는 흰구름을 쳐다보면서 부모님을 생각하고(望雲之情) 비탄에 잠겼다.

망운지정이란 이렇게 타향에서 자신도 신고를 겪지만 고향의 부모를 그리는 자식의 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후일 그의 평판이 높다는 말을 들은 측천무후는 다시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였고, 재상이 된 후 그는 장간지(張柬之)·요승(姚乘) 등을 추천하여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아 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었다. 어느 날 측천무후가 상서랑(尙書郞)으로 합당한 인물을 추천하라고 하자, 서슴없이 아들 광사(光嗣)를 추천하는 등 일 처리에 사사로움이 없었다 한다.

망운지회(望雲之懷)라고도 한다.

깽깽이풀

깽깽이풀

깽깽이풀

이 름 : 깽깽이풀

학 명 : Jeffersonia dubia

과 명 : 미나리아재비목

분 포 : 한국(경기·강원·평북·함남·함북)·중국

자생지 : 산중턱 아래의 골짜기

크 기 : 높이 약 25cm

개 화 : 4∼5월

꽃 말 : 안심하세요

깽이풀이라고도 부르며, 뿌리가 노란색이어서 황련·조선황련이라고도 한다. 산중턱 아래의 골짜기에서 자란다. 높이 약 25cm이다. 원줄기가 없고 뿌리줄기는 짧고 옆으로 자라며 잔뿌리가 달린다. 잎은 둥근 홑잎이고 연꽃잎을 축소하여 놓은 모양으로 여러 개가 밑동에서 모여나며 잎자루의 길이는 20cm 정도이다. 잎의 끝은 오목하게 들어가고 가장자리가 물결 모양이며 지름과 길이 모두 9cm 정도이다.

4∼5월에 밑동에서 잎보다 먼저 1∼2개의 꽃줄기가 나오고 그 끝에 자줏빛을 띤 붉은 꽃이 1송이씩 핀다. 화관은 지름 2cm 정도이고 꽃받침잎은 4개이며 바소꼴이다. 꽃잎은 6∼8개이고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며 수술은 8개,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골돌과이고 8월에 익는다. 넓은 타원형이며 끝이 부리처럼 생겼다. 종자는 타원형이고 검은빛이며 광택이 난다.

관상용으로 심는다. 한방에서는 9∼10월에 뿌리줄기를 캐서 말린 것을 모황련(毛黃蓮)이라 하여 소화불량·식욕부진·오심(惡心)·장염·설사· 구내염·안질 등에 처방한다. 한국(경기도·강원도·평안북도·함경남도· 함경북도)·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사진 : 임규동의 꽃사진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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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득수ㅣ蛟龍得水

교룡득수ㅣ蛟龍得水

교룡득수ㅣ蛟龍得水

○ 교룡이 물을 얻는다. 좋은 기회를 얻는 것

○ 蛟(교룡 교) 龍(용 룡) 得(얻을 득) 水(물 수)

북조 후위의 무제는 양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면서 이충에게 출정 병사를 선발하도록 했다. 이때 직급이 낮은 관졸이었던 양대안이 출정하기를 희망해 왔다. 그러나 이충은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양대안이 말했다. "당신이 저의 재주를 어찌 알겠습니까? 당신은 저의 재주를 몰라 저를 이해하지 못하니, 작은 재주나마 보여드릴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말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빨리 달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충은 그의 달리는 모습을 보고는 감탄하며 그를 군주의 관병으로 승진시켰다.

행백리자 반어구십ㅣ行百里者 半於九十

행백리자 반어구십ㅣ行百里者 半於九十

행백리자 반어구십ㅣ行百里者 半於九十

○ 백리길 가는 이는 구십리를 반으로 알아야 한다

○ 行(다닐 행) 百(일백 백) 里(마을 리) 者(놈 자) 半(반 반) 於(어조사 어) 九(아홉 구) 十(열 십)

백리길 가는 사람은 구십리를 반으로 알아야 한다, 마무리가 중요하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란 말이 시작을 중시한 것인데 비해 백리 길을 가는 사람(行百里者)은 구십 리를 왔더라도 반으로 알아야 한다(半於九十)는 이 말은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교훈이다. 줄여서 行百里者 半九十(행백리자 반구십)이나 行百里者 半九十里(행백리자 반구십리)로 써도 같다. 劉向(유향)의 ‘戰國策(전국책)’에서 유래한 성어다. 前漢(전한)의 학자인 유향은 戰國時代(전국시대)란 이름을 이 책에서 가져오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秦策(진책)에 나오는 내용을 간단히 보자. 秦(진)나라 武王(무왕, 재위 기원전 311~307)은 용력이 뛰어났는데 주변국과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이웃 나라들이 감히 넘보지 못했다. 무왕은 자신이 제일이라며 점차 자만심에 빠졌다. 한 현신이 나서 간언했다. ‘처음은 누구나 잘 하지만 끝을 잘 마무리하는 사람은 적다(靡不有初 鮮克有終/ 미불유초 선극유종)’는 詩經(시경) 蕩之什(탕지십)을 인용하며 말을 잇는다. ‘100리를 가는 사람은 90리를 절반으로 여긴다는 말은 마무리의 어려움을 말한 것입니다.’

이런 고언도 무색하게 무왕은 제 힘만 믿고 九州(구주)의 쇠붙이를 모아 만들었다는 九鼎(구정)을 들다 다리를 짓찧어 죽고 만다.

살처구장ㅣ殺妻求將

살처구장ㅣ殺妻求將

살처구장ㅣ殺妻求將

○ 부인을 죽여 장군이 되다,

○ 殺(죽일 살) 妻(아내 처) 求(구할 구) 將(장수 장)

큰일을 성취하려면 다른 일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 큰일만이 아니라 자신이 처음 결심한 일을 해나갈 때도 잡념에 마음이 끌리지 않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百濟(백제) 말기의 階伯(계백) 장군은 羅唐(나당) 연합군을 물리치기 위해 황산벌로 출전할 때 처자를 죽였다. 5000의 군사로 5만 대군을 막기 위해 나서면서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적의 노비가 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생각하면 가혹한 처사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도 명백하다.

듣기만 해도 끔찍하게 부인을 죽여(殺妻) 장군 자리를 구한다(求將)는 이 말은 명성이나 이익을 얻기 위하여 잔인한 수단도 망설이지 않는 것을 비유한다. 吳子(오자)라는 병서의 원저자로 보는 吳起(오기)의 이야기에서 나왔다. 싸움터에서 부하의 상처에 난 종기에 고름까지 빨아주는 장수, 吮疽之仁(연저지인, 吮은 빨 연)의 그 사람인데 참으로 집념이 무섭다. 春秋時代(춘추시대) 衛(위)나라 사람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재산을 탕진했다. 자신을 비웃는 자들을 30명이나 죽이고 도망하면서 어머니께 출세하기 전에는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魯(노)나라에 가서 曾子(증자)에게 배우고도 어머니 초상 때 가지 않았다고 배척당했다.

그 즈음 齊(제)나라의 대부가 열심히 하는 오기의 모습을 보고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딸과 결혼을 시켰다. 제나라가 침입하자 병법에 능한 오기를 노나라 장군으로 기용하려 했지만 부인의 출신이 문제가 되었다. ‘오기는 공명심에 불탄 나머지 자기 아내를 죽여 제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吳起于是欲就名 遂殺其妻 以明不與齊也/ 오기우시욕취명 수살기처 이명불여제야).’ ‘史記(사기)’ 손자 오기열전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