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7일 금요일

비교와 고유함

비교와 고유함

비교와 고유함

살면서 비참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때입니다.

\xa0

또한 교만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때 역시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할 때입니다.

\xa0

즉,\xa0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면 비참하게 생각되고,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교만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xa0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한 비교를 통해서는

올바른 자신의 성장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역시 항상 나쁘게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xa0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대신 그들의 고유함을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xa0

"

-조명연의 방향을 바꾸면\xa0중에서-\xa0

"

절차탁마ㅣ切磋琢磨

절차탁마ㅣ切磋琢磨

절차탁마ㅣ切磋琢磨

○ 옥이나 돌을 갈고 닦다.

○ 切(끊을 절) 磋(갈 차) 자琢(다듬을 탁) 磨(갈 마)

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아 빛을 내다라는 뜻으로,학문(學問)이나 인격(人格)을 갈고 닦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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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서 귀한 옥을 가공하는 4개 공정을 나타내는 글자가 각각 切磋琢磨(절차탁마)라고 했다. 먼저 원석에서 옥을 모양대로 잘라내는 것이 切(절), 원하는 모양으로 옥을 잘라서 갈아내는 磋(차), 원하는 모양대로 다듬는 琢(탁), 마지막으로 완성된 옥을 갈고 닦는 磨(마)의 단계다. 琢은 옥도 쪼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천성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학문이나 수양을 쌓지 않으면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없음을 비유한 명구 玉不琢 不成器(옥불탁 불성기)에 나온 그 글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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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 전부터 전해지던 민요를 모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 詩經(시경)에 처음 등장한다. 衛風(위풍)편에 나오는 빛이 나는 군자는 끊는 듯 갈며 쪼는 듯 갈아 엄하고 너그럽다(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유비군자 여절여차 여탁여마 슬혜한혜)에서 땄다. 모두 如(여)가 붙어 있는데 如를 생략해 切磋琢磨, 또는 더 줄여 切磨(절마)라고 쓰기도 한다. 여기선 옥을 다듬는 것이 아니고 군자가 스스로를 수양하기 위해 갈고 닦고 연마해야 좋은 그릇(器)이 만들어지듯 힘쓰는 모양을 비유했다. 匪는 비적 비이지만 대상자 비, 빛날 비도 된다. 인품이 뛰어나 고아한 대나무 같은 군자라는 뜻으로 진정한 군자를 일컫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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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이 더욱 유명해진 데에는 論語(논어) 學而(학이)편에서 인용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언변이 뛰어난 제자 子貢(자공)과 나눈 대화에서 나온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貧而無諂/ 빈이무첨) 부자라도 교만하지 않으면(富而無驕/ 부이무교) 훌륭하지만,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貧而樂道/ 빈이락도)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富而好禮/ 부이호례)이 더 낫다고 했는데 자공이 切磋琢磨가 바로 이 지경이라고 대답하여 칭찬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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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종극말ㅣ凶終隙末

흉종극말ㅣ凶終隙末

흉종극말ㅣ凶終隙末

○ 우정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지 못함

○ 凶(흉할 흉) 終(마칠 종) 隙(틈 극) 末(끝 말)

우정(友情)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지 못함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交友(교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극히 친하다가 끝에는 나빠져서 서로 틈이 생김을 이르는 말. ‘凶終’은 중국 秦(진)나라의 張耳(장이)∙陳餘(진여)의 옛일이며, ‘隙末’은 漢(한)나라의 蕭育(소육)∙朱博(주박)의 옛일에서 온 말. 後漢書(후한서)에 나오는 말이다.

거일반삼ㅣ擧一反三

거일반삼ㅣ擧一反三

거일반삼ㅣ擧一反三

○ 하나를 들어 세 가지를 돌이킨다는 말

○ 擧(들 거) 一(한 일) 反(돌이킬 반) 三(석 삼)

하나를 들어 세 가지를 돌이킨다는 말로 스승으로부터 하나를 배우면 다른 것까지도 유추해서 아는 것을 비유한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발하지 아니하면 열어 주지 아니하며, 애태우지 아니하면 말해 주지 아니하고, 한 모퉁이를 돌 때 세 모퉁이로써 돌아오지 아니하면 다시 일러 주지 아니한다.“ 이 글은 공자의 교육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학문을 좋아하여 마음속으로부터 분발하여 의욕을 나타내는 제자들 에게 그 다음 단계를 열어서 보여주며, 하나라도 알고 싶어 애태우는 제자에게 해답을 가르쳐 주고, 하나를 들어 주어 세 가지를 이해할 만큼 무르익을 때까지는 또 다른 것을 가르쳐 주지 아니한다.

이러한 공자의 교육 방법은 지식의 일방적인 전달을 배제하고 제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안회(顔回)가 있었는데 특히 학문에 뛰어났다.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 해서 문일지십(聞一知十)이라는 칭송을 공자로부터 들었다. 맹자도 군자삼락(君子三樂)에서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어쨌든 빼어난 인재를 얻기란 힘들기도 하고 또 얻었을 때는 보람 있는 일이다.

좌회불란ㅣ坐懷不亂

좌회불란ㅣ坐懷不亂

좌회불란ㅣ坐懷不亂

○ 여자를 품에 안고도 흐트러지지 않음

○ 坐(앉을 좌) 懷(품을 회) 不(아닐 불) 亂(어지러울 란)

春秋時代(춘추시대, 기원전 770년~403년)에 여자를 품에 안고서(坐懷) 하루 밤을 지내도록 흐트러지지 않았다(不亂)는 柳下惠(유하혜) 얘기다.

그는 魯(노)나라의 대부로 있으면서 덕행이 있고 예에 어긋나지 않게 국정을 이끌어 孔子(공자)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孟子(맹자)도 유하혜를 조화로운 성인 和聖(화성)으로 부르며 伊尹(이윤), 伯夷(백이), 공자와 함께 4대 성인으로 추앙했다고 할 정도다.

남녀가 함께 지내도 바르지 못한 행위는 없었다는 이런 스토리는 ‘荀子(순자)’ 大略(대략)편에 간단히 나온 것이 처음이다. 후대에 살을 붙여 前漢(전한) 毛亨(모형)의 주석에서 淸(청)나라 소설가 李汝珍(이여진)의 대표작 鏡花緣(경화연)에 이르기까지 수다히 인용됐다. 여기선 元(원)나라 胡炳文(호병문)의 ‘純正蒙求(순정몽구)’의 내용을 보자. ‘유하혜가 어느 때 먼 길을 다녀오느라 늦어서 성문 밖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다.

갑자기 한 여자가 와서 잘 곳이 없으니 같이 자게 해달라고 했다. 유하혜는 얼어 죽을 것 같은 그 여인을 품에 안고 옷으로 덮어주었다. 새벽에 이르기까지 난잡하지 않았다.

문경지교ㅣ刎頸之交

문경지교ㅣ刎頸之交

문경지교ㅣ刎頸之交

○ 생사고락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

○ 刎(목 벨 문) 頸(목 경) 之(갈 지) 交(사귈 교)

목을 베어 줄 수 있는 사귐이라는 뜻으로, 우정이 깊어 생사고락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를 말한다. 문경(刎頸)·문경교(刎頸交)·문경지계(刎頸之契)라고도 하며,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인상여(藺相如)는 원래 전국시대에 조(趙)나라 환관 우두머리인 무현(繆賢)의 부하였으나 진 소양왕(秦昭襄王)에게 빼앗길 뻔한 화씨의 구슬(和氏之璧)을 무사히 보전해 돌아온 공으로 상대부(上大夫)가 되었다. 후에 진나라 왕이 조나라 왕에게 민지(渑支)에서 회견을 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진나라의 왕은 조나라의 왕을 망신주고 굴복시킬 의도였는데, 이를 눈치 챈 인상여가 용기있게 나서 조나라 왕은 치욕을 면할 수 있었다. 회견을 마치고 돌아와 조나라 왕은 인상여의 공을 크게 치하하고 상경(上卿)으로 삼으니 대장군인 염파(廉頗)보다 지위가 높아졌다. 염파는 전장에서 직접 적과 싸우는 자신보다 겨우 입만 놀린 인상여가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을 못마땅해 하며 모욕을 주리라 다짐하였다. 이를 들은 인상여가 염파와 마주치지 않으려 늘 조심하는 것을 보고 그를 따르던 이들이 말했다.

"저희는 나리의 높은 뜻을 존경하여 곁에서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염파가 나리에 대해 나쁜 말을 퍼뜨리고 다니는데도 나리께서는 두려워 피해만 다니십니다. 이것은 일개 평범한 사람도 부끄러워하는 일입니다. 저희는 물러나겠습니다." 떠나려는 그들을 말리며 인상여는 말했다. "그대들은 진나라 왕이 무섭소, 염파가 무섭소?" "염 장군은 진나라 왕에 못 미칩니다."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나는 궁정에서 그를 꾸짖고 그 신하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은들 염장군을 두려워 하겠소? 내가 생각해보니, 강한 진나라가 감히 우리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지금 두 호랑이가 다투게 되면 둘 다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오. 내가 그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감정을 뒤로하기 때문이오."

인상여의 이 말을 들은 염파는 맨몸에 가시채찍을 짊어지고 인상여의 문 앞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했다. "비천한 제가 상경의 넓은 도량을 미처 몰랐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서로 기뻐하며 죽음도 함께할 벗(刎頸之交)이 되었다.

문경지교는 이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이밖에 막역한 친구사이를 뜻하는 성어로 교칠지교(膠漆之交)·관포지교(管鮑之交)·수어지교(水魚之交) 등이 있다.

토영삼굴ㅣ兎營三窟

토영삼굴ㅣ兎營三窟

토영삼굴ㅣ兎營三窟

○ 토끼가 세 개의 굴을 파다, 안전을 위해 대비하다.

○ 兎(토끼 토) 營(지을 영) 三(석 삼) 窟굴 굴

토끼가 危難(위난)을 피하기 위해 세 개의 굴을 파 놓는다. 자기의 안전을 위해 미리 몇 가지 방책을 짜 놓음. 토끼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 개의 굴을 파 놓는다는 이 성어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미리 대비책을 짜놓는 현명함도 지녔다. 狡兎三窟(교토삼굴), 狡兎三穴(교토삼혈)이라 해도 같다.

戰國四公子(전국사공자)는 戰國時代(전국시대, 기원전 403년~221년) 말기 각 제후국에서 빈객들을 수천 명씩 거느리고 세력을 떨쳤다. 유명한 齊(제)나라의 孟嘗君(맹상군)을 비롯하여 趙(조)의 平原君(평원군), 魏(위)의 信陵君(신릉군), 楚(초)의 春申君(춘신군)이 그들이다. 닭소리 내는 사람이나 개 도둑도 받아 鷄鳴狗盜(계명구도)의 성어로 유명한 맹상군은 거지 출신의 馮驩(풍환, 驩은 기뻐할 환)도 들였다. 무위도식하는 그가 음식이나 탈것 등에 불만을 늘어놓아도 맹상군은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맹상군은 薛(설) 지역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식객을 거두었는데 때가 되어 풍환에게 해결하라고 했다. 그는 가서 채무자들을 모아놓고 주인이 면제해 준다며 차용증을 태웠다. 그리고선 돌아와 태연히 돈 대신 은혜와 의리를 갖고 왔다고 했다. 맹상군이 재상에서 밀려나자 다른 식객들은 모두 떠났으나 풍환은 설 지역으로 모셔 그곳서 대대적 환영을 받았다. 맹상군이 고마워하자 풍환은 말했다. ‘토끼는 빨라도 굴 세 개는 있어야 비로소 죽음을 면할 수 있습니다(狡兎有三窟 僅得免其死耳/ 교토유삼굴 근득면기사이).’ 풍환은 이후에도 맹상군을 복위시키고, 설 땅에 종묘를 마련하여 평안한 만년을 보내게 했다. ‘戰國策(전국책)’과 ‘史記(사기)’에 실려 전하는 이야기다.

남우충수ㅣ濫竽充數

남우충수ㅣ濫竽充數

남우충수ㅣ濫竽充數

○ 악기를 마구 불며 숫자만 채우다

○ 濫(넘칠 남) 竽(피리 우) 充(채울 충) 數(셈 수)

무능(無能)한 사람이 재능(才能)이 체하는 것이나 또는 외람되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는 것을 말함. 악기를 마구 불며 숫자만 채우다,

사물을 분별하는 지혜나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가 分數(분수)다. 그런데 덜 떨어진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 주변에 의외로 많다. 실속 없는 자가 유난히 허세를 부리는 경우를 속담에서 ‘없는 놈이 있는 체 못난 놈이 잘난 체’라고 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는 것을 아울러 ‘세 가지 체병’이라며 주의하라고 깨우친다. 실력이 없는 자가 운 좋게, 또는 높은 사람에 잘 보여서 분수에 넘치는 지위에 올랐어도 밑천은 들통 나게 마련이다. 이럴 경우에 사용하는 성어가 竽(우)라는 피리를 제멋대로 부는 南郭(남곽)이란 사람의 이야기다.

戰國時代(전국시대) 齊(제)나라의 宣王(선왕)은 관악기의 일종인 우의 연주 듣기가 취미였다. 우를 불도록 할 때는 반드시 300명이 합주하는 것을 즐겼다. 남곽이라는 처사가 선왕을 위해 우를 연주하겠다고 간청하자 왕은 대단히 기뻐했다(南郭處士 請爲王吹竽 宣王說之/ 남곽처사 청위왕취우 선왕열지). 그러면서 남곽에게 다른 훌륭한 악사와 똑 같은 수준으로 수백 명분의 곡식을 내렸다. 남곽이란 자는 우를 전혀 불 줄 몰랐으나 다른 합주단원들의 틈에 끼여 열심히 연주하는 흉내를 내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선왕이 죽고 緡王(민왕, 緡은 돈꿰미 민)이 즉위했는데 그는 합주를 싫어하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부는 것을 듣기 좋아했다. 들통 날 것이 두려웠던 남곽은 그제야 줄행랑치고 말았다.

우를 아무렇게나 불며(濫竽) 악대의 숫자만 채운다(充數)는 고사는 ‘韓非子(한비자)’의 內儲說(내저설) 상편에 나온다. 濫竽(남우)라고 줄여서 말하거나 南郭濫吹(남곽남취) 또는 南吹(남취)라 해도 같은 의미다. 한비자는 여기에서 임금이 신하를 다스리는 일곱 가지 방법 七術(칠술)을 설명했다. 남곽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 들으면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반장ㅣ如反掌

여반장ㅣ如反掌

여반장ㅣ如反掌

○ 손바닥을 뒤집는 것 같다, 아주 쉬운 일

○ 如(같을 여) 反(돌이킬 반) 掌(손바닥 장)

아주 쉬운 일을 비유하는 많은 말 중에서 자주 쓰는 말은 ‘땅 짚고 헤엄치기’나 ‘누워서 떡 먹기’일 것이다. 손쉬운 것을 이를 때의 한자성어는 주머니 속 물건 꺼내는 囊中取物(낭중취물), 손바닥에 침 뱉기처럼 쉽게 얻는다는 唾手可得(타수가득), 태산으로 알 누르기 泰山壓卵(태산압란)처럼 아주 많다.

後漢(후한) 초기 역사가 班固(반고)가 지은 ‘漢書(한서)’에서 유래한 이야기를 보자. 劉邦(유방)의 조카인 유비는 6대 景帝(경제)때 吳王(오왕)에 봉해졌으나 세력을 모아 吳楚(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 이 때 저명한 문인 매승이란 사람이 성공하기 어렵다며 건의했다. ‘하고자 하는 바를 바꾼다면 이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며 태산처럼 안정될 것입니다(變所欲爲 易於反掌 安於泰山/ 변소욕위 이어반장 안어태산).’ 유비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가 진압군에 피살되었다.

같은 의미를 가진 反手(반수)는 이보다 앞서 ‘孟子(맹자)’에게서 나왔다. 제자 公孫丑(공손추)가 스승에게 자리가 주어진다면 齊(제)나라의 管仲(관중)이나 晏嬰(안영)과 같은 공을 이룰 수 있겠는지 물었다. 맹자는 질문에 언짢아하면서 답한다. ‘제나라로서 왕업을 이루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다(以齊王 猶反手也/ 이제왕 유반수야).’ 맹자는 안정된 대국인 제나라에서 인정을 베풀어 통일된 나라를 이끄는 것은 아주 쉽다고 본 것이다.

경죽난서ㅣ罄竹難書

경죽난서ㅣ罄竹難書

경죽난서ㅣ罄竹難書

○ 가시나무를 헤치고 쪼개다, 어려움을 이기고 나아가다.

○ 罄(빌 경) 竹(대 죽) 難(어려울 난) 書(글 서)

서기 105년 중국 後漢(후한) 때의 蔡倫(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전에는 대나무를 쪼갠 竹簡(죽간)에다 글을 썼다. 나라 안의 대나무가 다하도록(罄竹) 글을 써도 다 쓰기가 어렵다(難書)는 이 말은 저지른 죄가 하도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좋은 일을 이렇게 적을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오랜 관례상 죄를 열거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앞서 나왔던 머리카락을 다 뽑아 헤아려야 할 만큼 죄가 많은 것을 비유하는 擢髮難數(탁발난수)와 유사한 쓰임새다.

중국 隋(수)나의 煬帝(양제, 煬은 녹일 양)는 100만 대군으로 高句麗(고구려)를 침공했다가 乙支文德(을지문덕) 장군에 의해 크게 패한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양제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는 등 업적도 있지만 사치스런 생활에 정벌을 일삼아 백성들에 과중한 부담을 줬다. 왕의 폭정에 대항해서 각지에서 농민군이 들고 일어났다.

반란 세력 중에서도 가장 큰 瓦崗軍(와강군)의 우두머리 李密(이밀)은 수도를 공격하면서 양제의 죄악을 성토하는 격문을 발표했다. ‘남산의 대나무를 모두 사용해도 그의 죄를 다 적을 수가 없고 동해의 물을 다 쓴다 해도 그의 죄악을 씻어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