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6일 화요일

1차 왕자의 난 2편

■ 1차 왕자의 난 2편

■ 1차 왕자의 난 2편

이성계에게는 이방우 말고도 7명의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이방우의 죽음으로 7명의 아들 모두에게 세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특히 조선건국에 가장 공이 큰 다섯째 이방원은 자신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방원에게 있어서 장자(長子)인 이방우는 넘을 수 없는 산이었지만, 이제 그 산이 제거되었으니 당연히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방우 죽음 이후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 조준 등이 이방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때 이방원의 친모 한씨는 이미 죽고 없었고, 계비 강씨가 이성계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계비 강씨 신덕왕후의 의향에 따라 태조 이성계는 무안군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내정까지 했다. 하지만 정도전, 남은 등 개국 공신들이 방번은 “성격이 광망(狂妄)하고 경솔하다.”고 반대하여 세자 자리를 친동생이자 막내인 방석에게 빼앗겼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국공신들은 왕실 중심의 정부가 아니라 관료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강력한 힘을 보유하면서 삼십대 성인이 훨씬 넘어버린 이방원보다 나이가 가장 어린 방석을 후계자로 선정하려 했다. 신덕왕후 강씨도 자기의 두 아들 중 누가 왕이 되어도 별 상관없는 일이라 순순히 정도전 일파의 말에 따랐다.

그리하여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방석은 방번의 연년생 아우로 태조의 여덟 째 막내아들이었다. 불과 11세밖에 안 된 나이로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된 방석은 어머니 강씨의 보살핌과 정도전, 남은 등 개국 공신들의 지원에 힘입어 6년 동안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고 있었다. 그 6년은 이방원에게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인고(忍苦)의 세월이었다. 이 시기에 정도전은 이방원을 얼마든지 제거 할 수 있었지만 정도전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이방원을 그냥 무시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 넘치는 그 자신감이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꼴이 되었다.

방석이 세자가 되고 나서 6년이 지나면서 방석 친모인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세자의 배후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방원에게 다시 기회가 오고 있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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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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