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의 여인들 – 의인왕후 1편
■ 선조의 여인들 – 의인왕후 1편
선조는 중종과 창빈 안씨 소생의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다. 하성군 시절 그는 사리가 밝고 똑똑해서 명종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위의 두 형을 제끼고 후사가 없던 명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고 당쟁이 심화된 어려운 시기의 왕으로서 선조는 그다지 현명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모습을 보여 무능한 왕의 이미지가 강하다.
선조는 왕비 2명에 후궁 6명, 자녀는 25명(왕자 14명과 공주 11명)을 둔 다복(?)한 임금이었다. 선조의 조강지처 의인왕후 박씨는 명종 10년(1555년) 4월에 나주 박씨 박응순과 전주 이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종의 국상 중이기도 하여 혼인이 늦어졌는데, 대비인 인순왕후는 선조가 중전을 맞이하기 전에 후궁을 들이면 후사에 복잡한 왕위계승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미 대비의 눈을 피해 소주방(燒廚房:음식 만드는 주방) 나인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후에 임해군과 광해군를 낳은 김상궁이 바로 그녀이다.
선조 즉위 2년째인 1569년 15세의 의인왕후 박씨는 3살 연상인 18살의 선조와 결혼했다. 의인왕후 박씨는 성품이 부드럽고 검소했으며, 욕심도 적고 미인이었다. 하지만, 집안 좋고 맘씨도 착한데다가 이쁘기까지 했지만, 그녀는 안타깝게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리하여 인순대비는 어쩔 수없이 선조가 후궁을 들이는 것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궁이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은 공빈 김씨이고, 그녀는 선조 10년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왕비로서 가장 중요한 소임이라고 할 수 있는 후사를 보지 못한 의인왕후는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자식의 생산을 기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사찰을 설치하였고, 여러 사찰에 자주 재물을 베풀기도 했다.
의인왕후 박씨는 착한 마음씨만큼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의인왕후 박씨가 후사를 못 이으니, 이 기회를 노려 자기 자식을 세자로 앉히려고 하는 후궁들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게 된다. 공빈 김씨의 큰아들 임해군은 성격이 광폭하고, 둘째 광해는 성품이 온화하여 왕과 왕비는 광해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또 다른 후궁 인빈 김씨가 왕자 네 명과 옹주 다섯 명을 낳게 되자 사태는 좀 더 복잡해지고 말았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