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일요일

어영부영

■ 어영부영

■ 어영부영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허무하게 시간이 흘러 하루가 다 갔던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아무 생각이나 계획 없이 되는대로 행동할 때 ‘어영부영’이라는 말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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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이란 조선 후기 5군영(조선 초기에는 5위) 중 하나인 어영청‘ 이라는 매우 기강이 엄격한 정예 부대에서 유래한 말이다. 1623년 반정(反正)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자신의 친위대 역할을 위해 어영군을 만들었다. 건장한 자 260명을 모집하여 화포술(火砲術)을 가르치고 이를 어영군(御營軍)이라 한 것이 그 시초이다. 서인 세력의 무력 기반을 강화하고 국왕을 경호하여 새로운 반정을 막겠다는 것이 창설의 주 목적 이었다. 이들은 주로 포격 훈련을 했다. 당시 포는 조총이나 활, 칼 등을 능가하는 최신 병기였고,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반란이 있을 경우 초장에 강력한 화포와 조총으로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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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인조반정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2등 공신으로 밀려 평안도 군사령관에 임명된 이괄이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급기야 한양을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어영군의 경호를 받으며 충남 공주의 공산성까지 피난을 갔다. 그 곳 공주에서 솜씨가 뛰어난 민간인 포수를 뽑아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어영군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이후 인조는 자신의 친위부대로 어영군을 키워서 그 군사를 5천 명까지 증원하고, 명칭도 어영청으로 승격시켰다. 국왕의 친위부대인 어영청의 주력군대는 총이나 포 로 무장한 사수와 포수 정예병들이었고, 근접전을 위해서 살수병(화살부대)도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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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년(효종 3년) 효종의 북벌(北伐)계획에 따라 어영청은 보다 더 정비되고 강화되어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으로 삼아 북벌계획의 본영(本營)역할을 하였다. 효종 재위기인 1652년에 어영청의 병력은 무려 정예군 2만1천 명으로 대폭 확대되었다. 어영청은 이제까지 국왕호위 혹은 친위대라는 방어적 전략에서 북벌을 위한 공격적 군대 로 전환하고, 특수훈련을 받는 직업군인 으로 편성했다. 어영청의 전투력은 1654년, 1658년 두 차례 나선정벌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나선정벌은 청나라 요청을 받은 조선 조총부대가 러시아군과 중국에서 벌인 전투다. 함경도에서 모집된 조총부대는 무기 성능이 뛰어나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북벌계획은 준비만 하다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끝내 무산되었고, 목표가 사라진 어영청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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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오면서 어영군의 군기(軍紀)는 문란해지고 병기(兵器)마저 너무 낡아 도저히 군대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의 형편없는 오합지졸(烏合之卒) 군대가 되고 말았다. 양반 자제로 구성된 지휘부는 주색잡기로 소일하였고, 훈련이나 고된 부역은 종들이 대신토록 하였다. 이를 본 사람들이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라는 뜻으로 어영비영(御營非營)이라고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어영비영이 발음의 편리를 따르다 보니 어영부영으로 바뀌게 되었다. 1881년(고종 18년) 4월, 일본인 교관의 훈련 하에 새로 조직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만들어지면서, 신식군대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고 봉급조차 받지 못하던 구식군대는 1882년 6월 봉기하여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결국, 3년 후 갑오개혁 때(1894년) 어영청은 폐지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