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령왕릉 1편
■ 무령왕릉 1편
백제의 고분은 시대에 따라 크게 서울 석촌동·구의동 일대의 초기 돌무지무덤과 웅진(공주) 천도(遷都)이후의 송산리 고분군, 그리고 사비(부여)시대의 능산리 고분군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무덤을 칭할 때 보통 왕이나 왕비의 무덤은 능이라 하고(태릉, 정릉 등) 일반인의 무덤은 ‘~묘’라고 한다. 주인을 특정(特定)할 수 없는 옛날 무덤을 통상 글자그대로 고분(古墳)이라 칭하는데(일정지역에 여러 기의 고분이 모여 있을 때 고분군), 발굴은 했지만 왕에 준하는 사람 무덤 같긴 한데 주인공을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장군총처럼 ~~총이라고 한다. 1971년 7월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까지 삼국시대의 고분 중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신라 무열왕릉도 있긴 하지만 실제 위치가 특정되거나 발굴이 이뤄진 건 아니기 때문에 고고학·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삼국시대의 ‘능’은 무령왕릉 뿐 이다.
일제강점기의 국내 유적은 일본인들이 전부 발굴과 연구를 독차지했는데, 대부분 조선총독부 박물관 차원에서 담당하였다. 반면에 공주 일대 무덤을 발굴한 가루베 지온은 공주고등학교 교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박물관 측 일본인 조사자들과 유적, 유물의 발굴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박물관 또는 박물관 소속의 일본인 고고학자들의 발굴은 어쨌거나 박물관으로 유물이 옮겨져 전시되었던 반면, 가루베 지온은 발굴된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이러한 일제의 발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 특유의 낮은 봉분으로 인해 고분임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에 그 이유가 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면서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이었으므로, 축조연대·내부구조·부장유물을 온전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중국 남조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葬事) 예법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상호 간의 문화교류, 각국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점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령왕릉마저 도굴되었다면 우리는 백제의 예술 수준이나 국제관계 등을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그 동안 연구 자료의 빈약으로 미궁같았던 백제 문화의 참모습을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도 문화재 측면에서도 그 가치가 뛰어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고고학사(考古學史)에 있어서도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올해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공주시는 올해를 ‘무령왕의 해’ 로 정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