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 1편
■ 광해 1편
조선의 제15대 국왕 광해군의 이름은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선조에게는 14명의 아들을 있었지만 막상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공빈 김씨 소생으로 맏아들 임해군과 둘째 광해군을, 인빈 김씨 소생으로 셋째 아들 의안군과 넷째 신성군을 두고 있었다. 공빈 김씨는 아들 둘이 서너 살일 때 세상을 떴고, 왕실에는 달리 적자(嫡子)가 없었다. 어머니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인 1577년에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임해군과 광해군은 자식이 없던 의인왕후의 손에서 자랐다. 모정의 부재 속에서도 형인 임해군과 달리 광해군은 소년 시절부터 영민하고 도량이 넓어 일찍이 왕재(王才)로 인정을 받았다. 언젠가 선조가 왕자들을 불러 여러 가지 물건을 늘어놓고 마음대로 고르게 하자 왕자들은 앞다투어 보물을 골랐지만, 학문에 심취해 있던 광해군은 붓과 먹을 집어 들어 선조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 방계(傍系) 혈통으로 보위에 오른 탓에 늘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선조는 적통의 후계자를 갈망했지만 나이 마흔이 넘도록 적통의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의인왕후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장자인 임해군이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그는 무식하고 난폭한 면이 있었다. 선조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계문제를 놓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후궁에게서 난 많은 왕자들이 각기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빈 김씨는 자신의 소생인 어린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공작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었다. 조정과 민간의 인심은 영민한 광해군에게 쏠리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세 살 때에 죽은 처지여서 스스로 처신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들이 세자책봉을 거론하자 선조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그런데 서인의 리더였던 정철이 세자로 광해군을 언급하자 인빈 김씨 소생인 넷째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던 선조는 분노하며 그를 유배형에 처해 버렸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는 부랴부랴 급하게 평양에서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분조(分朝, 임시로 세자에게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하는 제도)를 맡아 난중에 동분서주하며 그 소임을 다했고, 조정과 민간의 명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광해군의 왕위계승권은 요지부동할 것 같았고 그 자신 또한 현군(賢君)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세자인 광해군이 솔선하여 각지를 돌며 의병을 모집하고 전투를 독려했으며, 군량과 마초를 수집하는 등 활발한 후방 지원 활동을 벌였다. 그러자, 흩어졌던 민심이 다시 모이고 도망쳤던 사대부와 조정 중신들이 모여 들었고, 그때부터 광해군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활약으로 전란 초기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되었던 조선군이 본격적으로 항전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