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 2편
■ 광해 2편
1592년 7월, 광해군은 이천에서 의병장 김천일에게 왜적과의 항전을 독려하는 격문을 보냈고, 전 이조 참의 이정암에게 황해도의 연안성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이정암은 500여 명의 의병으로 5,000명이 넘는 일본군을 격퇴하는 개가(凱歌)를 올렸다. 광해군은 또 명과 일본군의 화의 교섭으로 전쟁이 주춤해진 1593년 10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명군 지휘부의 요청에 따라 남행길에 올라 무군사(撫軍司)라는 조직을 이끌며 충청도와 전라도를 순행하고 민심을 살폈다. 18세에 불과한 광해가 평양성 탈환 때 까지 사실상의 조정인 분조를 이끌며 훌륭히 임금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선조가 의주에서 요동만 바라보며 여차하면 국경을 넘을 태세를 취하고 있을 즈음, 광해군의 활약 소식을 들은 젊은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군국의 기무를 모두 세자 저하께 맡겨 처리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라는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설상가상, 명나라도 선조의 무능함에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광해군이 눈치 있게 업무를 대강 수행했더라면 되었을 텐데, 너무나 열심히 임무를 수행한 덕분에(?) 선조(宣祖)의 눈 밖에 나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선조(宣祖)는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면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찾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투정부리듯 양위(讓位)를 선언해 버렸다. 전쟁의 와중에, 그것도 공식적인 것만 자그마치 19회씩이나! 선조는 사실 양위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조정 대신들은 양위선언을 철회하도록 수도 없이 상소를 올리고, 모두들 왕 앞에 나아가 양위(讓位) 취소 선언이 있을 때까지 엎드려 통곡하는 한심한 상황을 연출해야만 했다. 물론 천하의 불효자가 되지 않기 위해 세자인 광해도 며칠씩 끼니까지 굶어가며 차가운 뜰 앞에 꿇어 앉아 명을 거두어 달라며 엎드려 읍소(泣訴)해야만 했다. 국력을 총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중차대한 이 시점에 이 무슨 국력낭비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선조(宣祖)는 이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하면서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방편으로 삼았다. 선조는 이 방법을 통해 흔들리는 권력을 움켜잡았지만, 떨어진 위신까지 회복할 수는 없었다. 선조는 도망 다니며 제 한 몸 건사하기 바빴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볼 때마다 어린 나이에 위풍당당하게 나라의 구심점 역할을 한 광해군과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장군에게 열등감을 또 다시 느껴야만 했을 것이다. 선조의 이러한 질투와 열등감은 미움으로 변해갔고, 이는 결국 광해군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