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5일 금요일

시대의 이단아 허균 1편

■ 시대의 이단아 허균 1편

■ 시대의 이단아 허균 1편

허균(許筠)의 집안은 당대 최고의 명문 집안이었다. 동인의 영수인 아버지 초당 허엽(許曄)은 뛰어난 문장가이자 학자였고, 서경덕의 수제자로 정치가로서의 명망(名望)이 높았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광철의 딸로 허엽의 후처였다. 허성, 허봉, 허난설헌 등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문예에 뛰어난 인물들이다. 큰형 허성은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지낸 대정치가였고, 특히 누나 허난설헌은 한국을 대표하는 천재 여류시인으로 이름을 날렸으니 집안이 모두 학자요 천재였던 것이다. 이런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허균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을 잘 지어, 광해군 일기에 『글 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 수천 마디 말을 붓만 들면 쭉쭉 써 내려갔다.』고 적혀 있다.

허균(許筠)은 14세 때부터 형 허봉의 가까운 친구인 이달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이달(李達)은 박학다식한 인물이었으나, 출신이 서얼(庶孼)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사회에 발붙일 데가 없었다. 이러한 스승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허균은 자연히 서얼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허균(許筠)은 이미 10대에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20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피난길에 아내와 자식을 잃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허균은 우리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박학다식(博學多識)했던 사람이다. 그는 책 수천 권을 읽고 내용을 기억했으며, 중국 사절단 앞에서 시 수백 편을 통째로 외워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 국가 도서관에 《조선시선》이란 책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은 허균이 구술(口述)해 준 우리나라 한시들을 중국 사신이 받아 적은 것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의 시 332편이 실려 있다. 이것만으로도 허균이 얼마나 명석한 두뇌를 가진 천재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생각 또한 무척 자유분방하고 혁신적이어서 그는 수많은 서출(庶出)과 기생(妓生), 무사(武士), 심지어는 노비(奴婢)까지도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친구로 사귀었다. 당대의 고승인 사명당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로 깊은 교류를 하고 있었고, 기생 이매창과도 남녀관계가 아닌 우정을 나누며 가까이 지냈다.

평소 “귀천에 따른 차별이 없어야 하며,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 더군다나 양편에 적을 둔 나라에서 서얼이라거나 재혼(再婚)녀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 발전에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라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무서워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품고 살았기에, 그의 평소 소신이 담긴 소설 《홍길동전》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당대 사대부들과 이렇듯 다른 생각, 다른 삶을 꿈꾸었기에 그는 시대와의 불화 속에 처참히 죽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