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의 이단아 허균 2편
■ 시대의 이단아 허균 2편
여기에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이제껏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작가는 허균’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현재 전해지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에는 작자(作者)가 적혀있지 않다. 연산군시대의 실존 인물이던 홍길동의 이야기는 여러 버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고, 허균도 그 이야기를 차용해서 그의 사상과 소신을 주인공에 투영하여 작품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허균이 애초에 남긴 작품은 한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 학자들의 견해이다. 《홍길동전》의 작자를 허균이라 주장한 최초의 연구자는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조선문학 담당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1878~1967)이다. 다카하시는 1927년 조선 중기문인 이식(1584~1647)의 《택당집》에 실린 ‘허균은 또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비겼다(筠又作洪吉同傳以擬水滸)’는 구절을 들어 《홍길동전》의 작자를 허균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다카하시의 경성제대 제자들을 중심으로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택당집》에서도 허균의 《홍길동전》이 한글이라는 언급은 없다. 만약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더라도 그것은 한문이었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허균(許筠)의 글재주는 비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괴이한 행실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부모상을 입고도 기생과 놀아나고 참선과 예불에는 빠지지 아니한다. 그는 천지간의 괴물이다.』 라는 평을 들었다. 성리학의 고루함을 배격하는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진 천재의 행동을 당시의 잣대로 평가하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허균은 항시 "나는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허균(許筠)은 신지식으로 무장한 당대 최고의 국제적 인사이자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허균은 중국 방문을 통하여 선진 학문과 서학(西學)을 배웠다. 그는 2번의 중국 방문 동안 자그마치 은을 1만 5,000냥이나 들여 4,0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서적을 구입해 들여왔는데, 모두 이단 서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중에 유교경전 비슷한 것은 한 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책 중에는 천주교 책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17세기에 4,000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으면 당시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장서가(藏書家:책을 많이 가지고 있음)에 들었을 것이다. 자유분방한 천재가 이런 개방적인 사상을 접했으니 그에게 성리학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케케묵은 헛소리였다. 이러한 신사상을 접한 혁명가 허균(許筠)은 서자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허균(許筠)은 그의 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천하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라고 기록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을 경우 끝내는 혁명이 올 것임을 군주와 집권 세력에게 경고하고 있다. 사실 지금으로 봐서야 백 번 옳은 말이지만 당시에는 역모(逆謨)로 열 번도 더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는 또 조선의 신분제를 신랄히 비판하여 그 차별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지적하였으며,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가 등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