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의 이단아 허균 3편
■ 시대의 이단아 허균 3편
허균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선조 27년(1594)으로, 이후 여러 관직에 임명되어 최종적으로 좌참찬까지 역임했다. 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굴곡이 매우 심했다. 황해도 도사직에 있을 때 상소 때문에 관직에서 쫓겨났는데, 이유가 매우 황당했다. 서울의 기생을 데리고 가서 함께 살았다는 이유였다. 또한 성리학을 고집하는 일반 사대부와 달리 불교를 신봉하고 일탈 행동을 자주 해서 관직에서 여섯 번이나 쫓겨나고, 무려 세 차례나 귀양을 가야 했다.
그는 30대 부터 벼슬길에 올랐으나 기행으로 자주 삭탈관직을 당했고, 40대 중반부터는 이이첨과 더불어 광해군 시절 대북 정권의 핵심인물로 잘 나가다가, 50세에 반역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함으로써 천재의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이러한 삶의 행로로 보았을 때, 허균은 명석한 두뇌를 지닌 천재였으나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부딪치는 시대의 이단아였다. 유배지에서 쓴 글 중에 『당신들은 당신들의 법대로 사시오. 나는 내 멋대로 살겠소.』라는 대목에서도 그가 얼마나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는 일대 사건이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발생한 ‘칠서지옥(七庶之獄:계축옥사)’이다. 당대에 한가락 한다는 집안의 서자 일곱 명이 신분차별에 항의하여 난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 난에 허균이 말려들었다.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이들과 친하게 지냈기에, 일곱 서자들 뒤에 허균이 있다는 소문이 시중에 떠돌았다. 이로 인해 허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는데, 다행히도 별 탈 없이 넘어갔다. 당대 최고의 실세 이이첨이 허균의 바람막이가 되어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속 출세의 배경이 되어주어, 허균이 형조 판서를 거쳐 좌참찬으로 승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허균은 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이이첨, 정인홍보다도 더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에 앞장섰는데, 이 때문에 많은 사대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북인 내에서도 폐모에 반대하는 소북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좋지 않아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그런데 폐모에 반대한 기자헌이 귀양에 처해지고 길주로 유배되자,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은 허균이 배후조종한 것으로 의심, 부친을 구하기 위해 비밀상소를 올리고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617년 기준격 등은 계속 상소를 올려 허균이 역모를 꾸민다고 공격했다.
그 와중에 허균은 이이첨과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 광해군이 세자빈을 간택하려 할 때 허균도 자신의 딸을 세자빈으로 만들려 했으나, 이이첨의 외손녀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하지만 이이첨의 외손녀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내정되어 입궐하였다. 허균의 딸이 아이를 낳게 되면 허균에게로 권력이 이동할 것을 우려한 이이첨은 허균에 대한 경계를 한층 강화시켰고,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광해군 10년(1618년) 허균은 반역을 했다는 이유로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광해군이 직접 나서서 심문했는데, 허균은 끝까지 역모를 부정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전격 처형되고 말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