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1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1편
세종에게는 특별히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인다. 치세기간 동안의 업적도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우리나라를 독자적인 문자를 가진 나라가 되게 해 주었다. 세종대왕의 곁에는 훌륭한 부인 소헌왕후 심씨가 있었다. 세종대왕이 조선시대 이상적인 군주의 롤모델로 꼽힌다면, 소헌왕후 역시 이상적인 왕비의 롤모델로 조선시대 내내 칭송을 받았다. 소헌왕후는 조선역사상 내명부(內命婦)를 가장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이는 세종이 그 많은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내는 데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조선 최고의 국모이자 왕비이다.
소헌왕후 심씨는 태조 4년(1395년) 9월 양주에서 본관이 청송인 심온과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에 두 살 어린 충녕대군과 혼인하여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제5대 문종이고 둘째인 수양대군은 제7대 세조가 되었다. 셋째는 문필가로 유명한 안평대군이다.
본격적으로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면서부터 내조의 여왕은 그 진면목를 보여주었다. 소헌왕후 심씨는 남편 세종이 집안일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정사(政事)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심성이 후덕하고 겸손했으며, 많은 후궁을 거느린 남편에게 투기심을 보이지 않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덕목을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인자무적(仁者無敵)이었다. 역대 왕비 중 가장 많은 소생을 둔 소헌왕후는 자신 다음으로 많은 소생을 둔 신빈 김씨와도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김씨는 소헌왕후가 셋째 안평대군을 낳은 직후에는 둘째인 수양대군의 유모가 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신빈의 아이들은 수양대군과 친했으며, 뒷날 세조는 신빈과 그녀의 이복 아우들도 극진히 대해 주었다.
세종은 다섯 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중전 심씨는 후궁들에게 후덕하게 대했고 그들의 자식들도 친자식처럼 잘 대해 주었다. 세종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되는 법이다. 세종이 정사에 치중하여 성군이 되고 대왕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태종 이후 강화된 왕권의 덕도 컸지만, 부인 소헌왕후 심씨의 공(功)과 덕(德)도 무시할 수 없다. 겸손의 아이콘 소헌왕후. 하지만, 그녀에게도 가슴에 한이 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친정집안도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태종에 의해 시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와 마찬가지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말았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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