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내조의 여왕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내조의 여왕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년 3월 28일 목요일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4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4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4편

소헌왕후가 병이 나자 세종은 수시로 찾아와 보았고, 신하들에게 여러 차례의 불공을 명하거나, 병에 차도를 보이면 의원과 의녀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1426년, 세종은 직첩이 복원된 어머니 안씨와 소헌왕후를 배려해, 소헌왕후가 어머니 안씨와 만나 연회를 베풀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소헌왕후는 1446년 이질로 인해 52세의 나이로 차남 수양대군의 사저(私邸)에서 눈을 감았다. 세종은 소헌왕후가 죽자 차기 왕이 부모의 합장릉을 명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합장릉을 명하였고, 자신이 죽기 전까지 다른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1446년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헌릉에 모셔졌다. 그 후 그 서쪽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에 이실(貳室)의 형태로 조영된 세종대왕의 영능에 옮겨져 합장하게 되었다. 좌측 석실에 소헌왕후를 모시고, 우측 석실은 후에 1450년 세종이 사망하자 합장해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 2개의 격실 사이에 48센티미터의 창문(창혈)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해 합장릉의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했다. 그런데 세종의 능은 조성될 때부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주장 때문에 논란이 잦았다. 지관(地官)들이 강력하게 능 자리를옮겨야 한다고 권했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서 복지를 얻는다고 하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 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단 세종의 고집대로 능을 조성하긴 했지만, 세조 때 다시 강력한 천장(遷葬:이장)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서거정이 "천장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이 되었으면 되었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라며 반대해 옮기지 못했다. 결국 예종 1년(1469)에 천장(遷葬)했는데 그곳이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吉地) 중 하나라고 불린다.

영릉은 이장하면서 예종 때 선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灰隔:관을 구덩이에 넣고 주변을 회로 메움)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만약 소헌왕후가 좀 더 오래 살아서 손자 단종의 치세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 있었다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계유정난 자체가, 어린 단종 대신 수렴청정할 왕실 어른이 아무도 없어 정승들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집현전 학사들과 종친들이 불만을 품고 분열된 틈을 노리고 들어가 성공할 수 있었던 정변이었다. 소헌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명분도 없고 단종지지 세력이 분열될 일도 없어, 세력이 가장 약한 축에 들었던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 시각이 아닌 가족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어머니가 뻔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친동생들(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끝내 죽이는 등의 패륜을 감히 벌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한테만큼은 효자였던 수양대군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3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3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3편

내명부에 대한 안정적인 지도력은 후궁 문제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본인의 속마음은 어떠했을지 잘 모르지만, 후궁에 대해 질투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으로 일찍이 태종과 세종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다. 소헌왕후는 총애 받는 후궁은 더 대접하였고, 그들을 신뢰해 여러 자녀들을 후궁들에게 양육하도록 했다. 8남 2녀 중 막내인 영응대군의 양육은 신빈에게, 6남 금성대군의 양육은 태종 후궁 의빈에게, 문종의 자녀인 경혜공주와 단종의 양육은 혜빈에게 맡겼다.

하지만 소헌왕후는 마냥 부드러운 모습만이 아니라 강단있는 성품도 있었다. 세종 21년(1439) 임영대군이 궁녀들과 사통을 하여 세종이 그 관련자들을 벌주고 임영대군의 직첩까지 빼앗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 일을 임금에게 알린 것이 소헌왕후였다. 평소 후궁 뿐 만 아니라 자녀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였던 소헌왕후는 임영대군의 유모를 통해 이 일을 전달받았고 이를 임금에게 알렸다. 소헌왕후는 친자식의 비행이라고 하여 눈감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문종의 폐세자빈인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의 만행도 소헌왕후의 귀에 들어갔고, 그녀를 통해 밝혀졌다. 평소 소헌왕후의 내명부에 대한 통솔력에 인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강단있는 성품과 통솔력 있는 소헌왕후가 있었기에 조선 역사상 가장 안정했던 내명부라고 평가받을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또, 세종 8년에 한양에 큰 불이 났을 때, 당시 사냥을 이유로 지방에 나가 있던 세종대왕과 세자 문종을 대신해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이 화재는 보통 것이 아니라 천 가구가 넘는 집을 태웠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게다가 이 당시 그녀는 후일의 금성대군을 임신한 만삭의 몸이었다고 한다.

소헌왕후는 살아생전에 세종과 금슬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세종은 그녀를 깊이 존경하였다고 한다. 소헌왕후가 들어오고 나갈 때면 항상 세종이 친히 일어서서 공경의 예를 표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죽음과 친정 몰락의 서러움을 감내해야 했던 소헌왕후. 불교에 깊이 심취했던 그녀는 아마도 드러낼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을 불교에 의지했을 것이다. 소헌왕후는 결국 원망과 미움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고, 가정와 왕실의 평안이라는 한 단계 더 높은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런 소헌왕후가 있었기에 세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4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2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2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2편

태종은 왕위를 세종에게 선양(禪讓)할 때, 병권은 넘겨주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상왕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 심온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소헌왕후가 시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 조심조심 처신했건만 결국 우려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심온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출발하기 전에 환송연이 열렸는데,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상왕인 태종이 볼 때는 ‘감히 외척이 권세를 부리며 날뛰는 것’으로 생각하고 심기가 불편했다.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정(沈泟)이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세종이 아닌 상왕(上王: 태종)이 모두 쥐고 처리한다고 불평한 일로 대역(大逆)의 옥사(獄事)가 일어나고 말았다. 심온은 반역(叛逆)의 수괴(首魁)로 지목되어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국경선을 넘자마자 바로 체포되었고, 수원으로 유폐되어 곧 사약을 받았다. 그리고 뒤이어 심온의 동생 심정도 화를 당하고, 친정어머니는 관노가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소헌왕후 심씨의 친정집은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이 일로 폐비(廢妃)의 논의가 있었으나, 내조의 공이 크고 왕자를 출산했고 당시에도 4남 임영대군을 임신 중이었기에 폐비가 되지는 않았다. (1426년(세종8년), 어머니 안씨와 가족들은 천안(賤案)에서 제명되고 직첩이 복원된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던가? 소헌왕후도 자식문제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나중에 문종이 되는 세자 향의 아내들 때문이었다. 세자빈을 두 명이나 쫓아내야만 했다. 첫째 세자빈은 열여덟 살인 상호군 김오문의 딸이었다. 하지만, 열네 살의 세자는 세자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릴 때 같이 놀던 중전의 시비인 효동과 덕금이와 더 어울렸다. 세자빈 김씨는 질투심이 발동하여, 남편 세자의 사랑을 받겠다고 별 해괴한 짓거리를 다하다가 결국 들통이 나서 퇴출당하고, 친정 부모님과 함께 독약을 먹고 죽었다.

둘째 세자빈은 세자와 동갑인 봉여의 여식이었다. 이때 후사를 위해서 세자의 후궁도 들이게 된다. 그것도 셋이나.......질투심 많은 봉씨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되었다. 욕정을 참지 못한 세자빈은 시비(侍婢)와 동성연애를 하고 만다. 조선왕조 최초로........결국 쫒겨난 세자빈 봉씨가 친정으로 돌아오자, 아버지 봉여는 딸을 허리띠로 목 졸라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매 죽었다.

또한, 일생동안 가족에 대한 많은 비극을 겪었던 왕비이다. 그녀가 죽기 전에 자식을 셋이나 떠나보냈던 것이다. 그녀가 30대가 되고 나서 큰딸 정소공주가 세상을 떠났고, 50대가 되었을 때 5남인 광평대군이 요절하고, 이듬해 7남 평원대군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서 그 충격에 소헌왕후마저 건강이 악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왕비가 되던 해에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아버지인 심온이 처형당했고, 어머니는 관비로 전락했다가 사위에 의해 복권된 뒤 세상을 떠났다. 또한 자신의 큰며느리인 현덕왕후가 원손을 낳고 하루 만에 요절했다. 이런 불행한 가족사에 소헌왕후 본인도 힘들어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또한, 태조의 기세에 눌려 친정집의 몰락을 방관한 세종의 태도, 이에 대해 소헌왕후 심씨는 아무런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못내 서운한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래서 소헌왕후는 유달리 불교에 매달렸다고 한다.

- 3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1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1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1편

세종에게는 특별히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인다. 치세기간 동안의 업적도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우리나라를 독자적인 문자를 가진 나라가 되게 해 주었다. 세종대왕의 곁에는 훌륭한 부인 소헌왕후 심씨가 있었다. 세종대왕이 조선시대 이상적인 군주의 롤모델로 꼽힌다면, 소헌왕후 역시 이상적인 왕비의 롤모델로 조선시대 내내 칭송을 받았다. 소헌왕후는 조선역사상 내명부(內命婦)를 가장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이는 세종이 그 많은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내는 데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조선 최고의 국모이자 왕비이다.

소헌왕후 심씨는 태조 4년(1395년) 9월 양주에서 본관이 청송인 심온과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에 두 살 어린 충녕대군과 혼인하여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제5대 문종이고 둘째인 수양대군은 제7대 세조가 되었다. 셋째는 문필가로 유명한 안평대군이다.

본격적으로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면서부터 내조의 여왕은 그 진면목를 보여주었다. 소헌왕후 심씨는 남편 세종이 집안일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정사(政事)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심성이 후덕하고 겸손했으며, 많은 후궁을 거느린 남편에게 투기심을 보이지 않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덕목을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인자무적(仁者無敵)이었다. 역대 왕비 중 가장 많은 소생을 둔 소헌왕후는 자신 다음으로 많은 소생을 둔 신빈 김씨와도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김씨는 소헌왕후가 셋째 안평대군을 낳은 직후에는 둘째인 수양대군의 유모가 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신빈의 아이들은 수양대군과 친했으며, 뒷날 세조는 신빈과 그녀의 이복 아우들도 극진히 대해 주었다.

세종은 다섯 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중전 심씨는 후궁들에게 후덕하게 대했고 그들의 자식들도 친자식처럼 잘 대해 주었다. 세종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되는 법이다. 세종이 정사에 치중하여 성군이 되고 대왕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태종 이후 강화된 왕권의 덕도 컸지만, 부인 소헌왕후 심씨의 공(功)과 덕(德)도 무시할 수 없다. 겸손의 아이콘 소헌왕후. 하지만, 그녀에게도 가슴에 한이 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친정집안도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태종에 의해 시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와 마찬가지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말았다.

- 2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