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4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4편
소헌왕후가 병이 나자 세종은 수시로 찾아와 보았고, 신하들에게 여러 차례의 불공을 명하거나, 병에 차도를 보이면 의원과 의녀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1426년, 세종은 직첩이 복원된 어머니 안씨와 소헌왕후를 배려해, 소헌왕후가 어머니 안씨와 만나 연회를 베풀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소헌왕후는 1446년 이질로 인해 52세의 나이로 차남 수양대군의 사저(私邸)에서 눈을 감았다. 세종은 소헌왕후가 죽자 차기 왕이 부모의 합장릉을 명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합장릉을 명하였고, 자신이 죽기 전까지 다른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1446년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헌릉에 모셔졌다. 그 후 그 서쪽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에 이실(貳室)의 형태로 조영된 세종대왕의 영능에 옮겨져 합장하게 되었다. 좌측 석실에 소헌왕후를 모시고, 우측 석실은 후에 1450년 세종이 사망하자 합장해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 2개의 격실 사이에 48센티미터의 창문(창혈)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해 합장릉의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했다. 그런데 세종의 능은 조성될 때부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주장 때문에 논란이 잦았다. 지관(地官)들이 강력하게 능 자리를옮겨야 한다고 권했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서 복지를 얻는다고 하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 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단 세종의 고집대로 능을 조성하긴 했지만, 세조 때 다시 강력한 천장(遷葬:이장)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서거정이 "천장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이 되었으면 되었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라며 반대해 옮기지 못했다. 결국 예종 1년(1469)에 천장(遷葬)했는데 그곳이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吉地) 중 하나라고 불린다.
영릉은 이장하면서 예종 때 선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灰隔:관을 구덩이에 넣고 주변을 회로 메움)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만약 소헌왕후가 좀 더 오래 살아서 손자 단종의 치세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 있었다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계유정난 자체가, 어린 단종 대신 수렴청정할 왕실 어른이 아무도 없어 정승들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집현전 학사들과 종친들이 불만을 품고 분열된 틈을 노리고 들어가 성공할 수 있었던 정변이었다. 소헌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명분도 없고 단종지지 세력이 분열될 일도 없어, 세력이 가장 약한 축에 들었던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 시각이 아닌 가족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어머니가 뻔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친동생들(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끝내 죽이는 등의 패륜을 감히 벌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한테만큼은 효자였던 수양대군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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